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축민란 (문단 편집) == 기타 == *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 이순옥 씨는, [[1982년]] 86살로 작고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를 알리고자 노력해왔다. 아쉽게도 3의사가 묻힌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렸기에 그녀에겐 더더욱 한 맺힘으로 남았다. [[이규태]]의 [[에세이]]에 따르면 21살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하며[* 출처: [[http://m.chosun.com/svc/article.test.html?sname=news&contid=1999040870334|#]] 정황상 [[개신교]]일 가능성이 높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그녀의 [[교적]]을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 이순옥 자신은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십니다. 하나님을 팔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을 꾸중하러 보내신 겁니다. 오빠는 하나님 편입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재수 본인도 압송되기 전 하느님에게 자신의 유명을 빌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에선 다 큰 처녀로 나오지만, 당시 이순옥 씨는 고작 5살밖에 안되었다. 현지에서는 '오돌또기 할망'이라고 불렸다는 모양. [[http://egloos.zum.com/idreamofu/v/2313068|#]] * 한국 교과서는 물론 역사책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던 이 사건은 [[제주도]] 출신 작가이기도 한 [[현기영]]에 의해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제목으로 재조명되었다. [[재일]] 출신 소설가 [[김석범]](본적 제주도)의 소설 《[[화산도]]》에서도 일부 언급되기는 하지만 거의 [[현기영]]에 의해서 발굴된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사건 당시인 1901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조선)|김윤식]]이 남긴 일기 《[[속음청사]]》를 기본으로 [[황성신문]] 같은 당대 신문 기사들도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으고 썼다고 한다. [[1999년]]에는 [[박광수(영화 감독)|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이재수가 너무 광기에 찬 모습으로 나와 제주도에선 "이재수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도 영화 촬영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아부오름 정상에서 촬영하도록 협조했으며 당시 도지사였던 [[우근민]]이 엑스트라로 특별출연을 했다.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에선 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알리는 게 아닌가 우려도 했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가톨릭 여러 고위 성직자들은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종교로서 세계에서 학살과 차별을 조장한 가톨릭의 역사를 되새기고 반성할 기회"라 하여 "영화에 대한 반대 시위와 같은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긴 했다. 어찌 됐건 영화는 기대 이하 평과 [[서울]] 관객 5만이라는 심히 저조한 흥행으로 참혹하게 사라져서 이 사건은 다시 묻혔다. 제작비만 40억 원을 들였기에 참패했고, 박광수 감독은 이후로 [[독립영화]]를 주로 감독하고 있다. 이재수의 난 개봉 후 제주도에 집중호우가 내렸는데 당시 몇몇 도민들은 오름 정상을 촬영지로 제공해서 오름신이 노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영화 주연으로는 [[이정재]], [[심은하]]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한 [[영화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2021학년도 수능]] 대비 [[수능완성]] 국어에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의 대목이 수록되었다. * 2003년에서야 당시 사망자 317명 이름이 담긴 책인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이 공개되었다. 여기에는 정확한 사상자 수와 사상자의 이름까지 나와있는데 그동안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는 인식[* 그런데 이 인식은 가톨릭 측 주장이었다. 그만큼 자기들 신자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다가 이게 공개되면서 이제 300~350명, 이전과 달리 절반 정도로 인정한다.]과 달리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이 책자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309명이 희생당했으며, 민군은 모두 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로 절대다수가 남성이었다. || [[파일:external/pds18.egloos.com/e0006522_4dc5f5461f05e.jpg|width=100%]] || || 당시 사망자 명단을 적은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 * 당사국이었던 프랑스도 굉장히 난감한 입장이었다. 왜냐면 당시 프랑스 내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반종교적 성향이 득세하던 시절이었고, 결국 얼마 못 가 1905년 법으로 [[정교분리]]([[라이시테]])를 못박아놓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자였던 셈이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사건사고]][[분류:천주교 제주교구]][[분류:대한제국의 사건사고]][[분류:학살 사건]][[분류:제주특별자치도의 사건사고]][[분류:1901년/사건사고]][[분류:봉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