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축민란 (문단 편집) === 민란의 끝, 그리고 이재수의 처형 === 5월 31일, [[프랑스 해군]] [[함대]]가 제주도에 도착했고, 대대적으로 참전할 뜻을 보이자 비로소 [[대한제국]] 정부도 급히 제주도 측에 사람을 보내서 자칫하면 외국 군대가 참전하여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했다. 또한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야기할 수도 있었던 사건인데 [[제물포]]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해군 군함들이 갑자기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일본 해군 군함들이 프랑스 군함들을 추격하여 제주도 앞바다로 따라온 것. 당시 일본 해군은 프랑스 함대에 조선의 내정에 개입할 경우 일본군이 사태에 개입하겠다고 통보했고 자칫 제주도 앞바다에서 프랑스 군함과 일본 군함이 교전을 벌일 뻔했다. 당시 세계 정세를 보면 일본은 영국,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였고 프랑스는 영국과 대립 관계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는 [[영불협상]]은 1904년에 이루어졌다.] 참고로 훗날 [[러일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도 영국과 대립하며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자칫 [[한반도]]를 가지고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인 러일전쟁과 유사한 일이 2~3년 일찍 발생할 뻔한 것이다. 프랑스 함대와 일본 함대가 잇달아 제물포를 빠져나간 것을 탐지한 미국과 대한제국은 즉시 미국 [[외교관]]과 대한제국 관리들을 탑승시킨 배를 제주로 보냈고 이들의 중재로 프랑스 함대는 살아남은 일부 천주교 신자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물러난다. 이미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이 멋대로 쳐들어와 백성을 학살하던 걸 겪었거니와 이번에는 프랑스가 들어와 간섭할 것을 우려한 정부에선 깊이 우려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재수는 "정부가 외국 군대를 겁내고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냐"라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있으면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것을 알고 1901년 [[6월 10일]], 1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 백성의 저항군을 자진 해산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톨릭,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통해 요구 조건이었던 교폐와 세폐 방지를 보장 받았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라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학살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 이렇게 백성들이 공권력의 부패에 맞서 무장 봉기한 다음, 관과 협상을 하여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대신 지도부 몇몇만이 총대를 메고 자수해서 목숨을 대가로 내놓는 사례는,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는 거의 관례적으로 반복되는 사례이다. 이때 지도부로서 봉기의 모든 책임을 지는 자를 장두(狀頭)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정부를 상대로 그 정부 공권력의 비리를 고발하는 고소장의 고소인으로써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도 '장두를 서다'라는 단어가 실려 있으며 그 뜻은 [[현대 한국어]]의 [[관용어]]에서 '[[총대]]를 메다'라는 표현의 의미와 같다.] 오대현은 "관노 출신의 용기 있는 이가 모든 책임을 다하는데, 내 어찌 양반으로서 가만히 볼 수 있겠는가. 천한 것이라며 그를 얕보지 마라. 그의 기개는 대장군감이었다."라며 이재수를 칭송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괜히 무기를 들고 나섰겠는가? 조정의 무책임과 외세의 약탈로 피해 보는 백성을 생각해 달라."라고 당시 조정과 가톨릭 측을 법정에서 꾸짖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1901년 [[10월 9일]],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영화에선 참수형)을 당하여 삶을 마쳤고, 제주목사 김응석과 대정군수 채구석[* 배상금 부담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배상금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불가능으로 여겨질 정도로 난공사인 천제연 도수로공사를 완성시켜 5만 평 가량의 황무지를 농지로 탈바꿈시켰다. 참고로 그의 5남인 채몽인(蔡夢印)이 세운 기업이 [[애경그룹]]이다. 다만 며느리 [[장영신]] 회장이 천주교인인 데다 [[제주항공]]이 누구네 회사인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하다.]은 파직되었으며 몇몇 주동자들은 징역형을 살았다. 또한 또 하나의 원흉이었던 강봉헌은 이재수와 도민들의 요구로 인해 재판을 받고 파직당했다. 하지만 이들 셋이 모든 책임을 졌기에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 이순옥과 오대현의 아우와 강우백의 식솔들은 일체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이재수 등이 봉기군을 해산하고 자수함으로서 프랑스 해군 등 외국군은 개입할 명분을 잃었고, 제주 도민들의 피해도 줄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재수 등은 주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죽은 가톨릭 신자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 말이 되어서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