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종(송)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북송 신종.jpg|width=300]] >왕안석은 사람됨이 고집스럽고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여 조종이 유계(幽薊)와 영무(靈武)를 삼킬 뜻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신종은 분연히 장차 여러 대에 걸친 치욕을 씻고자 했지만 마땅한 조치가 아직 없었기에 결국 편협한 견해와 왜곡된 학문이 일어나 조정을 장악했다. 청묘법(靑苗法)·보갑법(保甲法)·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수리법(水利法)이 이미 제정되었지만 천하는 흉흉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신종은 끝내 이를 깨닫지 못했고 바야흐로 단연히 원로들을 쫓아내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물리쳤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신법을 추진했다. 끝내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은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바뀌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간사하게 남에게 아첨하는 이들이 날마다 승진했고 인심이 날마다 떠나갔고 화란이 날마다 일어났다. 안타깝구나! >----- >[[송사]]의 논찬 결과적으로 신종 대의 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잘 정비된 관료제 속에서 격화된 당쟁으로 연결되었다.[* 송나라의 관료제는 태종과 진종 연간에 정비되었고 신종 연간에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는다.] 또 추진된 정책들이 좌초되면서 사회 모순은 심해져만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받는다. 즉, 그의 묘호인 신종에서 드러나듯''' ‘개혁을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끝이 나고, 재위 기간 동안 칭송할 업적도 애매해서 뚜렷한 특징을 잡기에도 애매한 황제’ '''라고 평가받고 있다. 당장 신종 생전 희녕변법 추진 과정에서 조정은 찬반 논쟁으로 당쟁이 벌어졌고, 타협점이 사라질수록 당쟁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당쟁 속에서 신•구법당 관료들이 탄핵되고 지방으로 좌천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본인도 지치고 동력을 상실해갔으며 설상가상 신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게 되었다. 신법 추진 후 현실에서도 문제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다. 특히 인종 말부터 줄어드는 세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개혁이 모순만 심화시키고 신법 중 일부를 악용한 관리들의 등장[* 신법을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구법당으로 몰고 권세를 쥔 대표적인 인물은 여혜경과 휘종대의 권신이자 대표적인 간신 채경이 있다.]으로 이전에는 없던 탄핵과 숙청, 부정부패마저 만들어버렸다. 또 신법의 미숙함으로 재정 적자 폭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려 세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선인성렬황후 수렴청정 시기와 철종의 친정기를 합친 철종 연간에는 재정 적자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를 이은 휘종 연간이었는데, 황제와 황실의 사치, 채경, 동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잇단 실정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선인성렬황후, 철종이 안정화시켜 놓은 국고가 바닥이 나게 되었다.]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군사력은 나날이 약해져 갔다. 따라서 '''신종 사후 송나라는 각종 모순들이 터지고 당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약해진 군사력을 가지고, 쇠퇴하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금나라]]을 상대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신종이 죽은 뒤, 어린 철종을 대신해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정권을 잡은 구법당파(원우당파)는 신종이 추진했던 신법 조치들을 즉시 폐기했다[* 선인성렬황후와 사마광 등 노신들이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신법의 좋은 취지와 달리 제도가 악용되고 토목사업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법이 시행된 이후 농민들이 부역에 동원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증가했다. 더해서 세금 수취 과정에서도 각종 부정부패들이 생겨나 왕안석의 생각과 달리 신법의 방향성이 왜곡되는 부작용들이 제도 여기저기에서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선인태후와 사마광은 신법을 급격하더라도 당장 폐기해 민생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광이 재상이 된 지 8개월만에 죽으면서 제대로 된 후속책이 나오지도 못했고, 선인성렬황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장돈]] 등 과거 왕안석과 신법을 추진해 온 원칙론적인 신법당파들이 돌아오면서 당쟁은 심화되고 타협점을 찾기 힘들어졌다. 할머니 사후 친정을 하게 된 철종 역시 아버지가 추진했던 신법을 다시 펼치려 했지만 이마저도 불과 25세의 나이에 철종이 요절하면서 미완의 개혁으로 끝나버렸고, 철종의 짦은 친정기 동안 원우당인 사건, 맹황후 폐출 사건 등이 벌어지면서 신•구법당 감정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이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와 증포, 채변 등의 결정으로 가장 황제감이 아닌 휘종이 즉위한 이후의 송나라는 철종 연간보다 당쟁이 더 심해졌다. 특히 철종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난 뒤, 제왕 교육도 받지 못한 휘종 대신 섭정을 맡은 상태후의 조치들은 말그대로 미봉책에 가까웠고, 이마저도 알맹이 없는 과거 회귀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때 상태후의 조치들을 보면 죽은 친딸 주국장공주 개칭, 폐후가 된 맹황후 복위, 원우당파 복권, 한충언과 증포의 재상 기용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 중 신•구법당간의 당쟁을 막고자 단행한 한충언, 증포 기용은 오히려 갈등 끝에 증포가 한충언을 쫓아내고 집권한 뒤 증포 중심으로 조정이 운영되다가 증포의 추천으로 복귀한 채경이 집권하는 일련의 결과를 낳았다. 또 철종이 쫓아낸 맹황후를 복권시킨 조치는 상태후 사후 다시금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는 데 또 다른 빌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상태후의 조치들과 그녀의 짦은 수렴청정은 당쟁을 완화시키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북송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더해서 수렴청정을 하던 상태후는 철종의 섭정을 했던 시어머니 고태후처럼 안목이 뛰어나거나 유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휘종이 올바른 제왕이 될 시간도 벌어주지 못하며 1년여만에 사망했다. 당연히 재목도 아니었고 준비도 안 된 휘종이 친정을 하고 난 뒤, 그의 총애를 받은 채경에 의해 신법을 무기삼아 다시 원우당파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때 상태후에 의해 복권된 맹황후가 다시 폐출되고 각지에 원우당비가 설치되면서 과거의 명신들까지 당쟁에 포함시키는 등 철종 친정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당쟁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특히 휘종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집권 이후 꾸준히 구법당, 신법당에 상관없이 자신과 그 무리를 따르지 않으면 모조리 쫓아냈다. 이렇게 채경이 중심이 된 간신들이 신법을 무기삼아 정적들을 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종은 채경이 탄핵되더라도 다시 복직시켰으며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울러 휘종을 포함한 황실의 사치,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철종때 애써 줄여놓은 재정 적자는 다시 늘어났고, 채경 등은 이를 메꾸기 위해서 신법을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사용해 무리하게 수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까닭에 각지에서는 [[송강#s-4|송강의 난]], [[방랍의 난]] 등의 민란이 일어났고, 각종 사회적 모순들이 더 심화되었다. 또 외교적으로 요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어설픈 전략 등을 펼치다가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발생한 비극이 [[정강의 변]]이었다. >송 신종은 변법파의 후원자였다. 하지만 그는 기백이 부족하고 사상이 깊지 못했으며 성격도 강직하지 못했다. >----- >왕재충의 평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