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종(고려) (문단 편집) == 생애 == ||<-3> '''{{{#670000 등극한 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의 아들}}}''' || || '''{{{#670000 18대}}}''' || '''{{{#670000 19대}}}''' || '''{{{#670000 20대}}}''' || || [[의종(고려)|의종 장효대왕]] || [[명종(고려)|명종 광효대왕]] || [[신종(고려)|신종 정효대왕]] || 1144년(인종 22년), 부왕 [[인종(고려)|인종]](제17대)의 보령 36세 때 태어났다. 인종은 2년 뒤인 1146년에 38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아들 신종이 몹시 어린 나이이던 3세 때 세상을 떠났으니, 신종은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 소생으로 이름을 '왕민'이라 했고, 만조백관이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했다. 원래 팔자대로라면 왕민은 왕위와 전혀 관계가 없을 [[왕자]]였는데, 그의 위로 동복형들이 [[의종(고려)|의종]], [[대령후]] 왕경, [[명종(고려)|명종]], 원경국사 충희 등 4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째형 의종의 즉위 당시 왕민은 겨우 3세의 [[어린이]]에 지나지 않았다. 1154년(의종 8년) 10세때 평량후에 봉해졌고, 이후 공작으로 진작했다. 봉지인 '평량'(平凉)은 옛 [[고구려]]의 평원군이었으며, [[신라]]의 북원소경이기도 했다. 평량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이다.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 첫째형 [[의종(고려)|의종]]이 [[폐위]]되었고, 셋째형 [[명종(고려)|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1182년(명종 12년), 넷째형 충희가 [[사망]]했다. 원경국사 충희는 왕가를 떠나 [[승려]]가 됐지만, 좋지 않은 행보를 보여줬다. 충희는 왕실을 떠났으니 정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나중에 죽은 것인데, 공예태후는 충희가 무신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화병에 걸렸다. 당시 평량공 왕민은 [[치질]]에 걸려 오랫동안 집 밖을 못 나가고 있었는데, 공작이 문안을 못 오니 태후는 평량공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명종은 평량공을 수레에 태워 태후전에 같이 가 모후를 알현했고, 같이 술잔을 따라주는 등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1196년 4월, 제4대 무신 집권자 [[이의민]]의 목숨을 빼앗고('''병진정변''') 제5대 무신 집권자가 된 [[최충헌]]이 1197년, 형 명종을 폐위하고 54세의 평량공을 사저에서 데려와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시켰다. 대관전(舊 천덕전)은 [[만월대|본궐]]의 제2정전인데, 형 명종이 즉위한 곳이기도 했다. <최충헌 [[묘지]]명>에 따르면 최충헌은 평량공을 황태제(皇太弟)의 [[신분]]으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황태제가 이름만 거창한 작위인 것이 명종은 진작에 [[장남]] 왕숙(훗날의 제22대 [[강종(고려)|강종 원효대왕]])을 [[태자]]로 임명하여 왕숙이 오랜 기간 동안 태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최충헌이 명분이 부족하니 억지로 끌어들여서 황태제로 올렸기 때문이다. 1197년 9월 대관전에서 축하를 받은 후 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의봉루(儀鳳樓)에서 명종을 폐위한 반란군을 [[칭찬]]해주는 일이었다. 의봉루는 의봉문 위에 있는 누각이었으며 옛 신봉루였다. 의봉루는 [[만월대|본궐]]의 세 번째 대문이었으며 매우 화려한 누각이었다. 반란군은 [[의종(고려)|맏형]]과 [[명종(고려)|셋째 형]]을 제멋대로 폐위하는 것은 물론 모후 공예태후 임씨까지 화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만든 자들이었다. 이후 최충헌,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 최충헌 부하들의 직위를 올려주었다. 1197년 10월 신종은 휘를 '민'(旼)에서 '탁'(晫)으로 개명했는데, 왜 바꿨냐면 '민'(旼)이 [[금나라]] 태조 [[태조(금)|완안아골타]]의 [[한자]]식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의 금나라에 대한 반감을 엿볼 수 있는데 상국으로 받드는 금나라 태조의 이름을 고려 왕자의 이름으로 쓴 것으로 [[피휘]]를 안했던 것이다. 신종은 공작 시절 [[꿈]]을 꿨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천탁'(千晫)으로 바꿔주었다. 꿈 이후 신종은 즉위했는데 개명을 위한 회의를 할 때 한 [[신하]]가 '탁' 자를 추천하자 내심 신기해하면서 이를 따랐다고 한다. 1198년 [[만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여전히 고려의 혼란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1200년 [[선정태후|왕후]]를 '궁주 원비'(宮主 元妃)로 책봉하는 한편 맏아들의 이름을 '왕연'(王淵)에서 '왕덕'(王悳)으로 바꾼 뒤 왕태자(王太子)로 봉했다. 1201년 4월 주리들의 횡포로 인해 [[진주시|진주]]에서 공사 [[노비]]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간신히 평정되었다. 1202년 [[제주도]]와 [[경주시|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한편 당해에 형 명종이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203년 12월, 등창(등에 [[종기]]가 나는 병)에 걸렸는데, 최충헌이 직접 문병했다고 한다. 1204년 1월, 병이 나을 기세가 도통 없자 최충헌과 논의했다. 문병을 마친 최충헌은 [[궁궐]]을 나와 부하들과 사저에서 은밀히 선양에 관해 논의했다. >'''신종''': "짐이 번저(藩邸)에서 보위(寶位)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공의 힘 덕분이었소. 나이는 늙어가고 병까지 걸려 더 이상 청조(聽朝)할 수 없으니 태자에게 전위하려고 하오. >'''충헌''': "상께선 깊게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위]]의 명령은 신이 감히 쫓지 못하는 것입니다." 1204년 1월 5일, 신종은 선위를 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최충헌에게 피력했다. 최충헌이 태자 왕덕에게 신종의 이 같은 뜻을 전하자 태자는 울며 이를 거부했다. 신종은 천령전(千齡殿)으로 가서 태자에게 조칙(詔勅)을 내렸다. >"짐은 얇은 덕으로 큰 기업(基業, 왕조의 기반)을 그르쳤다. 이제 늙고 병에 걸려 청정(聽政)하지 못하겠다. 너 원자(元子)는 학업이 빛나고 덕은 민의 소망을 채울 수 있으니 대보(大寶)를 너에게 넘겨 쓰도록 하라." 최충헌은 태자에게: >"군부(君父)의 명령은 굳이 거부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한 뒤 강안전(康安殿)[* 옛 중광전으로 [[만월대|본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으로 데려가 임금의 복장을 바치고 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2번 절을 했다. 군주(왕덕)는 북쪽, 신하(최충헌)는 남쪽에 서니 '이제 태자 왕덕이 임금이다.'라는 뜻이었다. 태자는 대관전(大觀殿)[* [[태조(고려)|태조]]가 세운 옛 천덕전으로 고려 본궐의 제 2정전이다.]에서 만조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신종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최충헌에게 말했다. >"오늘 짐이 원한 것이 이루어지니 병도 같이 낫는 듯 하다. 경은 짐 부자(父子)에게 바친 공덕이 얇지 않은데 갚을 길이 없다." 말을 마친 뒤 눈물을 흘리니 최충헌은 2번 절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후 주변 [[중방]] 소속의 [[관리]]들을 향해 >"더이상 경들을 못 볼 것이니 다음 왕을 열심히 섬기라" 고 당부하자 모두가 울었다고 한다. 신종은 차남 [[덕양후]]의 사저로 옮겨 갔다가 퇴위한지 8일만인 1204년 1월 13일, [[향년]] 61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역대 고려 군주들 중 [[환갑]]을 넘긴 군주는 신종 포함 총 7명인데, 딱 환갑이 된 해에 숨진 군주이다. 정궁 내의 전각인 응건전(應乾殿)에 [[시신]]을 안치하지 말라고 하여 별궁인 정안궁에 빈소를 차렸다. 묘호를 '신종'(神宗)이라고 정한 뒤 태묘에 [[제사]]지내고, 시호를 '정효대왕'(靖孝大王)으로 올렸다. 이후 형 명종의 손자 [[고종(고려)|고종]](제23대)이 '경공'(敬恭) 시호를 추가했다. 고종의 왕후인 [[안혜태후]]의 조부가 바로 신종이었다. [[성평왕후]]의 시호를 올릴 때 신종을 언급하여 '성황'(聖皇)이라 부르며 우대해줬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03_big.jpg|width=100%]]}}} || || '''양릉(陽陵)''' || 신종의 [[무덤]] 양릉은 오늘날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다. 이 능에서 [[고려청자]] 조각이나 장신구 등의 [[고려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어 고려 중기 [[문화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무덤 내부의 천장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158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신종의 양릉까지 이어진 [[전통]]이다. 2009년 [[고려왕릉]]의 모습을 일부 공개한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에 따르면 [[북한]] 측에서 복원을 잘못하는 바람에 깨진 난간석이 능 주변에서 굴러다니고, 능 규모도 왜소해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