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무부무군(無父無君) === 이듬해인 1801년(신유년)에 박해가 시작됐다. 애초에 정치공작으로 시작한 터라 타겟은 분명했다. [[천주교]] 신자로 유명했던 [[남인]] 인사들을 잡들이하는 게 의도였고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원래 혐의가 있던 최필공(토마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그의 사촌동생이 또 축일에 사람들과 의식을 치르다, 어이없게도 [[도박]]판을 단속하는 관원들에게 걸려서(…) 적발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앞서 말했듯 [[천주교]]는 [[진산 사건]]을 거치며 반체제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영 불리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인의 핵심 인사였던 채제공[* 차마 정조를 깔 수 없었던 벽파는 대신 그를 '공작정치의 달인'이라며 욕했다.]도 2년 전 사망한 상태라,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를 제어할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었고 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인들마저 서로 물어뜯기 바빴다. 이 시점에서 신나게 털리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참으로 재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정약종]]은 압박이 심해지자 땔감으로 위장해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聖物)들을 숨기려 했는데, 이것이 또 하필이면 불법 [[도살]]을 단속하는 인원들에게 적발되었다. --[[경찰국가]] 조선의 위엄-- 이 책에 정약종이 쓴 [[낙서]]가 있었으니, 바로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이었다.'''[* 정확히는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다.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 ([[https://hankookilbo.com/News/Read/201906041603331990|#]]) 이 말을 앞뒤 다 자르고 [[단장취의]]한 게 '무부무군'이라지만 원문은 원문대로 쇼킹한 게 사실. 앞뒤잘랐다고 해도 무부무군과 크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말도 아니다.] 대체 이 낙서를 [[정약종]]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불분명하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가 곧 무부무군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즉 천주교도들은 '부모고 나랏님이고 뭐고 없는 [[패륜]]종교를 믿는 [[역적]]도당'으로 취급당한 것이다. 윤지충의 사례에 덧씌워 확신하기에 더없이 좋은 껀수가 나타난 것이다. 사실 천주교도 부모를 공경하는 종교고, 천주교인들은 "그거 오해입니다!! 우리 말을 좀 들어 보세요!!"를 외치며 반박했지만, 본디 남인 공격이 목적인데다가, 때마침 나온 저 충격적인 낙서는 오해고 뭐고 천주교인들을 제거하기엔 충분한 명분이었다. 이 무군무부 꼬리표는 오랫동안 이어져서, 정약종의 차남 [[정하상]]도 이것에 대해 [[상재상서]]로 해명해야 했다. 역모를 입에만 담아도 가족과 함께 이승을 하직해야할 판에[* 심지어 장난삼아 말했을지라도 죽어야 했다. [[예종(조선)|예종]] 때 두 갑사가 새벽에 [[까치]]가 운 거 가지고 장난삼아 "새벽에 [[까치]]가 울면 주인이 저승 가는데, 이 궁 주인은 주상이니 주상이 곧 죽는거 아님? 그럼 영순군이 왕 되겠네?"라고 했다가 걸려서 참수 후 3일간 [[효수]]당했고, 갑사들의 입에 올랐다는 이유로 영순군도 죽을 뻔 했다! 장난삼아 한 말도 이정도다. 다만 이 사건은 왕권에 대한 도전에 극히 민감했던 예종대의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 '''국왕이 정치를 못하고 어리석으니 나라가 엉망이다.''' 라는 요지의 디스에 가까운 [[상소]]를 받은 국왕들은 넘쳐났고 [[경종(조선)|경종]]대의 [[노론]]은 국왕이 버젓히 살아있는데도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한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예종대 같았으면 모두 역모죄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다만 전자의 경우는 흔히들 신하들이 "정치 좀 잘 하세요!" 라는 의미로 날리는 충고였고 후자는 경종의 권위가 워낙 미약해서 벌어진 특이 케이스로 이것도 결국 삼수의 옥이 터지며 노론 4대신이 처형되는 등으로 보복받았다.] 그걸 기록으로 남겼으니 얼마나 좋은 먹잇감이겠는가. 있는 그대로만 봐도 충분히 불충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문제다. 이 낙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라 오히려 소문이 늦게 퍼졌다고 한다. '무부무군'이라는 4글자를 사람들이 감히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흉흉한 글귀' 따위로 돌려말하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