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폭풍전야 === 정조 치세에 박해가 아주 없었다는 건 아니다. 윤지충 바오로 사건 외에도 [[1785년]] '''명례방'''[* 현재 명동. [[1898년]] 이 자리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인 [[명동성당]]이 세워진다.]에서 모인 이벽 세례자 요한,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총억 등 양반 자제들이 모여 신앙집회를 열었는데 우연히 형조의 관리들에게 들킨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768&keyword=&gubun=01|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났다. 장소를 제공해 준 역관 '''김범우[* [[가톨릭/대한민국|한국 가톨릭]]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가 모든 책임을 지고 혹한 고초 끝에 단양으로 유배 중 사망했고, 이벽 등은 양반가의 자제라는 점이 적용되어 가볍게 훈방 조치만 당했다.[* 이벽은 이후 아버지에게 배교를 강요받고 칩거하다가 사망했다.] [[정조(조선)|정조]] 입장에서야 [[천주교]]는 뭐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종교문제로 정국이 요동치는 것을 싫어했을 뿐. 중앙정치와 상관없는 동네에서 천주교를 털든지 말든지 정조가 알 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정조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정학인 [[성리학]]이 바로 세워진다면 저절로 사라질 사([[邪]])"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주교]] 공동체는 정조가 죽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하지만 말 그대로 문제를 대충 묻은 것에 불과해, 언젠가는 크게 터질 일이었다. ~~[[남북전쟁]]~~ 남인은 정계에서 소수당파인 데다 유교적 명분도 부족했다. 여전히 비천주교인이 대부분이었을 남인 세력의 딜레마가 여기서 드러난다.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좋게 말해도 들을 리가 없고, 드러내놓고 천주교를 공격하면 상대 당파의 먹잇감이 되는 셈이었으니까. 어쩌면 [[성호 이익]]의 천주교 극딜은 이런 사태들을 조금은 예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795년]] 북경교구에서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성직자)|신부]]'''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당시까지 조선은 자체적으로 가성직을 두어 성무와 강론을 처리했다.[* 이게 사실 엄밀히 말하면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17308|독성죄]]가 되긴 했다만… 매우 열악한 상황으로 인한 예외적인 사례다.]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교리서를 집필해 쓰기도 했는데, 나중에 주문모 신부는 이 <주교요지>를 보고 호평했다고. 신부의 입국은 조선 신자들에게 한 줄기 빛… 이 되는 듯했으나, 정부에서 이것까지 고이 두고 볼 일은 없어 주문모 신부는 도피생활을 계속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