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신해박해([[진산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진산 사건)] '''윤지충 바오로'''는 [[전라도]]의[* 윤지충의 고향인 진산군은 현대에는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추부면, 진산면이지만 당시에는 전라도 소속이었다.] 평범한 [[양반]]으로, [[1791년]]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그리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는 '''"나는 이제부터 [[제사]] 안 지냄"''' 이라고 선언하는 것이고, 실제로도 안 지냈다. 윤지충은 이 모든 일들을 슬그머니 벌인 것도 아니라 외사촌인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대놓고 자행했으며, [[충공깽|경악한]] 친척들과 [[키배|대판 싸웠다]]. 결국 이 소동은 나라 전체에 소문이 퍼졌고, 조정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조사 결과 윤지충의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신주를 불태운 것이 윤지충 하나만은 아니었으니… 끌려온 윤지충은 어떻게 변명하지도 않고 '''"[[야훼|천주님]]께 죄를 짓느니 사대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낫다"'''고 일갈해 조정에 극심한 반발을 부른 후 결국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자리에는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들어서 있다. 당연히 사대부로 이루어져 있는 조정이 당파를 막론하고 [[천주교]]가 반체제라며 극딜을 퍼부은 건 당연지사. 벽파는 말할 것도 없고 시파, 남인들조차도 맹비난을 퍼부었다. 아니, 국가체제의 존재의의가 [[유교]]에서 나왔던 조선에서 "제사가 별건가"라고 말하는 윤지충은 대역죄 확정.[*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게 대역죄로 비치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조선에선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아비를 받드는걸 임금을 받들듯 했다. 즉 '''부모에게 제사 지내지 않는 건 부모를 받들지 않은 것이자 군주를 받들지 않는 것이다.'''] [[참수형]]도 어떻게 생각하면 제법 관대한 처사다.[* [[사형]] 참조. 조선에서는 [[교수형]]-참수형-[[능지형]]의 순으로 관대한 것으로 보았다. [[사약]]은 왕이 특별히 내리는 자비에 가까웠다. 윤지충의 사례는 거의 [[강상죄]]에 상응하는 벌도 받을만한 일인데, 조선에서 강상죄를 저지르면 그 장본인은 물론이고 [[연좌제|일족까지 전부 박살난다.]]] 여기서 정조는 일을 대충 덮었는데 그 이유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 윤지충은 죽일 놈이니까 죽였다. * [[신주]]를 불태웠다는 딴 놈들은, 가난해서 [[제사]]를 못 지낼 형편이라 그랬단다. 불쌍하지? 얘네들은 봐 줌. * '''그러니까 이것으로 끝내자.''' 남인 몇을 불러 "얘들아, [[천주교]]는 불경스러우니까 앞으로 멀리해라, 알았지?"라고 타이르고 덮어버렸다. 벽파 세력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상식적으로 [[가난]]해서 제사를 못 지냈다고 하더라도 신주를 불태울 것까진 없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얼마 지나 제사를 폐한 천주교 신자가 또 나타난다. 지방관의 보고로 중앙정계에 알려진 이 건에 대해 정조는, '내가 끝내자고 했지? 너 지금 나한테 불만 있냐? 개기냐?'라는 격한 반응을 보인다. 정조는 자신의 더러운 성깔을 유감없이 발휘해 보고자를 열렬히 [[디스]]했으며, 이 관리는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귀양]]길을 가던 중 병사… 사실 관리 입장에선 보고를 안 하기도 뭐한 게, 나중에 천주교인들을 일부러 봐 줬다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기 때문. 무엇보다 관리의 의무가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인데 제사를 폐한 불경스러운 인물을 묵인한다는 것 자체가 맞지가 않다. 조선의 관리로서는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대충 묻으려는 왕의 의도를 읽지 못해 명을 재촉한 것. 이 해프닝은 천주교 관련 문제를 대충 묻겠다는 정조의 의지의 표현이었고, 강경파 쪽에서는 이런 처사에 이만 갈게 된다.[* 사실, 천주교를 믿어도 정조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인재가 있으니 살살 달래면서 이들을 살려주고픈 의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앞에 말한 천주교에서 자신들도 제사 비스무리한 행사를 하면서 동양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은 엄연히 횡포이자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간섭이고 모욕이다. 거기다 이게 잘못하면 정조의 입지 기반도 흔들 수 있기도 하기에, 웬만하면 좋게좋게 처신해서 넘어가려고 한 것.] "정학(正學)을 바로 펴면 사학(邪學)은 절로 없어진다"는 것이 정조의 논리였고, 정조는 문체와 서체를 가만두지 않고 문체반정과 서체반정을 일으킨다. 사실 정조의 방침은 [[에도 막부]]의 [[후미에]](십자가 밟기)처럼 천주교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긴 했다. 바로 배교라는 절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거짓 증언이라도 배교한다고 뱉는 순간 10년 공부(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신앙)가 녹아버린 [[얼음]]처럼 되는 것"[*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 기사] "말만 해라. 그럼 [[살려는 드릴게]].”라는 논지. 이 정조식 방침은 이후의 천주교 박해 때도 그 자체는 유지되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이었고, 이런 관대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십년간 [[순교자]]는 늘어만 갔다. 당대 유교사회에서 이런 (가문의 운명까지 포함 된) 집단자살(!)로 볼 만한 “서학쟁이”, “천주학쟁이”들의 순교가 얼마나 [[컬쳐쇼크]]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