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조선인, 스스로 [[가톨릭]]을 받아들이다 === 자세한 것은 [[가톨릭/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조선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은, [[중국]]에 정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의도치 않은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매우 박식했다. 자연과학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황제는 [[강희제]]나 [[대포]]에 맞은 직후의 [[천명제|누르하치]] 정도였겠지만, 어쨌거나 [[달력]]은 제왕의 초월적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였다. 선교사들은 천체운동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황제의 호의를 샀으며, 덕분에 [[북경]]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예수회]] 선교사제들은 본업인 중국 선교활동에도 힘써, 한문으로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것들이 [[외교]] 사절로 북경과 [[서울]]을 오가는 조선인들의 눈에 뜨이게 된다. 이들은 [[중국인]]은 아니었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어떤 학문의 하나로 인식'''하였으며, 선교사들이 중국에 소개한 다른 '과학적인 것'들과 함께 별 거부감 없이 천주교 서적을 조선으로 들여오게 된다. 여담으로 동시대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 [[선교사]]들에 대한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은근한 관심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과학기술과는 달리 천주교에는 상세한 의견을 밝히지 않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할 문제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겠다. 그에게는 딱 문제가 될 만한 선에서 대충 뭉개며 넘어가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뭔가 불온하기는 한데 꼭 집어 말하기는 불가능하니, 오직 기발함만에 술렁일 수밖에. 정조도 트집을 잡을 것은 결국 문체밖에 없었던 것이다([[문체반정]] 참조).[* [[정조(조선)|정조]]는 "[[불교|불도]]나 [[도교|노도]]는 중국에서 굳이 박해한 적이 없다"며-- [[삼무일종법난]]은?-- “불교의 별파”인 서학도 정학이 바로 서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박지원이 [[티베트 불교]]를 [[개소리]]로 매도하고 [[달라이 라마]]를 사기꾼 취급하며 미친 듯이 까긴 했지만, [[불교]] 배척한다고 천주교에 호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도 면천군 군수 시절 잡아들인 천주교도에 대해 크게 해코지를 하진 않았지만, 다만 말과 이론으로써 천주교도들의 논박을 뭉개버리는 등 글을 통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실 박지원 입장에서는 딱히 [[천주교]]에 호의적일 이유가 없는 게, 이 사람은 어쨌든 [[노론]] 계열인 데다, 당대 기준으로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야훼|하느님]]이라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면 부정적이었지 호의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 그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하면서도 이치에 닿는 서구의 문명 자체였지, 천주교 교리가 아니었다.] [[북경]]으로부터 들여 온 천주학 서적(대표적으로 천주실의)을 접하고, 조선인들은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대체로 천주교를 [[불교]]의 아종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교산 [[허균]]. 천주학 서적을 들여온 장본인이자 비록 이단아라 불렸음에도, 그는 [[천주교]]를 '천당과 지옥으로 어리석은 대중에게 겁을 준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남인계의 거목이었던 [[이익(실학자)|이익]]은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이란 논문에서 천주교에 대해 조목조목 비평하는데, 그가 보기에 천주교는 합리성을 결여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익이 상세한 비판을 남겼다는 것은 천주교의 중심 교리가 조선 사상계에도 알려져 있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상황이 이익의 비판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 얄궂은 일. [[1779년]]에 [[이벽]], [[이승훈 베드로|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權哲身,1736 ~ 1801), 이총억(李寵億) 등이 [[경기도]] [[광주시]]의 '''[[천진암 대성당|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토의하는 모임을 가졌다.[* 천진암 모임 당시 이총억은 14세였다.] 이들은 [[남인]]계 학자들로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천주교]]는 이 청년들에게 진리로서 다가오게 된다.''' 남인들은 정계에서 상대적으로 불우한 상태였고, 그들의 원리주의적 성향에 비추어 [[천주교]]의 교리는 매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천진암의 멤버들 중 하나인 [[이승훈 베드로|이승훈]]이 [[1784년]] [[베이징]]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세례명]]은 [[베드로]]) 공식 신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전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 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이는 후일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의 시성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