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유박해 (문단 편집) == 결과 == 100명 이상이 [[순교]]. 주로 남인계의 양반계급이 대상[* 노론, 소론, 북인 양반 신자도 있었으나 극히 소수이었다.]이었고 이로서 남인은 대몰락. 이후의 천주교는 [[중인]] 계층과 일반 민중들이 앞서 주도하게 된다. 물론 신유박해에서도 일반인 [[순교자]]는 꽤 있었고 신유박해 이후에도 양반계층 [[순교자]]는 꽤 존재했지만 말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종교탄압으로, 황사영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서 백서를 쓰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넘어서는 더 가혹한 참사'''가 일어났으니, '''[[병인박해]]''' 문서 참조. 기존 유학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불신은 이로써 확고해졌다. [[서양]]에 대한 반발감이 생긴 건 덤. "서양 = 천주교 = 부모/군주/나라 부정 = 반역"이라는 레퍼토리는 이후 척화세력에게까지 이어졌다.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는 [[순조]]가 16세에 이를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을 지배했고 수렴을 거두고도 조정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지 스스로 수렴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렴을 거두기가 무섭게 시파에서는 "벽파들이 국혼을 방해하고 [[안동 김씨]]들을 모함했다!!"고 맹렬히 공격했고, 정순왕후는 벽파에 대한 공격에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공격으로까지 확대되자 다시 수렴을 치려다가 소론 이시수의 논리적인 반발에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순원왕후]]를 들이는 것을 자신이 지지했다고 해명하는 글을 남긴 다음에 불과 몇달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2년 만에 벽파는 이안묵, 권유, 김달순 등의 자폭으로 사실상 싹쓸이를 당해 최후의 정치적 당파인 벽파가 사라지게 된다. 남인들의 무부무군으로 인해 대역죄로 숙청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병인갱화]]로 벽파 또 한 대역죄로 인해 자멸했으니 말이다 시파는 특정 정치적 의리를 띄고 있지 않으니 무색무취했고 결과적으로 조정의 권력은 [[김조순]]에게 넘어갔다. 김조순은 막후 정치로 만족했으되 그가 죽은 이후 안동 김씨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조선은 세도정치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신유박해 이래 조선은 박해로, 천주교도들은 [[순교]]로 대응하는 전통(?)이 생겨났으며,[* 다만 이는 [[한국 천주교]]의 특별한 문화는 아니고, [[제국주의]] 시대 천주교 선교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이었다. [[주경철]] 저,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설명하면서 이를 다루고 있다. 사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도 이런 성향이 있었다.] 이는 이후 [[기해박해]], [[병오박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이때 순교했다.] [[병인박해]] 등 60년에 걸쳐 이어지는 대규모 박해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의 단초가 되었던 [[교황청]]의 제사 금지는 [[1939년]] 없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2014년]], 윤지충 등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시복]]되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고.[* 이는 다른 박해들보다 늦게 이뤄진 것이며, 이들도 절차를 거쳐 시성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약종, 홍낙민, 강완숙, 동정부부 유중철 이순이 등은 들어갔으나,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등은 순교 과정에 석연찮은 면이 있다 판단되어 제외되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제사]] 금지는 [[교황청]]의 실수이자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현대 시각으로 보자면 조선의 제사를 금지시키는 것은 엄연히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간섭과 침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효를 가장 중요시했던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제사는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옛 [[조상]]에 대한 당연한 의무이자 그들에게 경건한 자세로 예(禮)를 다하는 것이었다. [[불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제사같은 행사를 안 하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조선은 가난해서 제사를 치루지 못하면 "사정이 그러니 제사를 못할 수도 있지, 뭐."라고 넘어갈 정도로, 제사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미신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하층민같은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하층민들이 하는 미신적인 제사 광경만 접하고 제대로 된 제사를 행하는 곳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조선은 미신적인 제사만 하는 곳이다."만 보고하면서 제사 전체를 금지시킨 것이다.[* 사실 천주교라고 모두 제사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이보다 앞선 시대에 온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는 중국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최대한 현지에 깊게 뿌리박힌 유교 친화적인 포교방식을 택했다. 천주라는 이름 역시도 예수회에서 그리스도교식 신 개념이 딱 맞는 한자어가 없고 유교에도 맞춰주다보니 유교경전에서 나오는 '천주' 라는 명칭을 택하여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온 다른 수도회들은 예수회와는 달리 현지에 맞춰주는게 없다보니 이렇게 된 것. 그리고 당연하지만 예수회처럼 현지 친화적인 포교에 나섰을 때는 그나마 중앙정부로부터 어느정도 용납받거나 덜 탄압받거나 했지만 현지를 무시하고 포교에 나서면서 현지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완전히 빠져든 신도 외에는 모두가 돌아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름 나쁘지 않았던 동양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으로 변해 이탈자가 속출했고, 일부 과격파들이 정신나간 짓을 하면서 조선 전체가 천주교에 대한 척화와 박해라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교황청의 잘못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선교사들이 제대로 조사를 해서 "조선의 조정에서 문제 삼고 있는 미신적인 제사를 없애는데 우리도 동조하겠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면, 조선의 조정에서도 천주교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봤을지도 모르며 여러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주교 신자들이 너무 늘어나면 정치적인 보수파들에 의해 탄압되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척화라는 가혹한 정책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