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용욱 (문단 편집) == 생애 == [[일본]] 오쿠리비행학교를 나와 1등조종사 면허를 받았다. 이후 동아항공전문학교, [[미국]] 실라헬리콥터학교 조종과를 졸업하여 미국 헬리콥터 조종사 면허도 취득하였다. 귀국 후 조선비행학교를 창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조선의 청년들을 모집, 비행술을 가르쳤다.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였다. 게다가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는 일본군 비행기 수백대를 헐값으로 구입하여 고철로 처리, 막대한 이익을 남겼으며, 이 해에 대한국민항공사(KNA, 현 [[대한항공]]) 사장이 되었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같은해 3월 특별검찰부 검찰관에 의하여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백관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1952년경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대한국민항공사 여객기 1대가 납북되는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 재정적인 손실을 입은 뒤 계속 사업에 실패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홍순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상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 부정축재 등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그 해 8월 12일 출소하였고, 공민권이 상실되었다. 이후 사업을 위해 끌어다 쓴 약 십억환 이상의 채무에 시달리면서 임직원들의 급여까지 밀리게 되자 8월 25일 저녁 KNA 임원에게 중요한 회사 서류와 금고 열쇠 등을 맡긴 뒤 행적을 감추었고, 며칠 후인 28일 [[여의도공항]] 부근 강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가 사업 실패를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자살 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