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영철(배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대한민국]] 남자 배구의 [[리즈 시절]]인 [[김호철]], [[강만수(배구)|강만수]] 다음 세대인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남자 배구의 지휘봉을 잡았던 세터다. 플레이 스타일은 극한의 지략 싸움과 변칙, 기교를 중시하는 타입으로 장신 공격수의 호쾌한 오픈 공격보다 손동작을 이용해 블로킹을 따돌리는 짧고 낮고 빠른 토스로 스피드와 맞춰잡기에 능한 변칙 공격수의 활용을 극대화해 게임을 운영했다. 현역 시절에 [[상무 배구단|상무]]를 [[배구/한국 세미프로|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 때 이재필, 노진수, 오욱환, 김동천, 유병종 등 평균 신장 190cm가 안 되는 단신 군단을[* 이들중 가장 큰 유병종이 190cm. 오욱환,이재필,노진수,김동천은 188cm였다. 이중 상무의 해결사는 라이트 오욱환이었다. 점프력이 좋고 공격이 날카로운 왼손 공격수였던 오욱환은 서울시립대 89학번으로 입학했으나 선배들의 가혹행위때문에 한때 배구를 관두고 소풍을 가서 공사판,웨이터일까지 전전했었고, 주변의 도움으로 대학 2학년때 상무 입대를 하고나서 신영철 버프로 재기에 성공해 대통령배 우승타이틀을 얻고, 제대후 LG화재에 복귀해 은퇴가 임박했던 노장이자 LG화재의 주포 이상열을 받치던 라이트로 활동했으며 이상열 은퇴후 LG화재에서 주전 라이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신영철 덕에 배구인생을 다시 시작한 대표적인 선수.] 이 테크닉과 조직력으로 이끌었고, 한국전력 복귀 후에는 소속 팀에서는 김성용, 김기회, 차승훈, 심연섭, 국가대표팀에서는 [[박희상]]과 이재필 등 단신 공격수의 활용에 매우 능했다.[* 반대로 신진식은 신영철과 잘 맞지 않는 타입의 공격수였고, 성균관대학교 입학 전후까지만 해도 테크닉이 아니라 운동능력으로 배구하던 선수였다. 때문에 국대에서도 신영철이 주전세터이던 시기에는 박희상에 밀려서 교체, 반주전 정도의 위치였다. 이후 최태웅이 국대 세터로 올라오면서부터 국대 주전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신장이 작은 팀이라도 그의 스타일에서 경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현재 감독으로서 현역 세터 선수들에게 시범을 보여주는데 현역들이 [[https://youtu.be/4rK_vz3Zt7A|기가 죽는다]]는 말이 있다. [[https://web.archive.org/web/20151116062024/http://todor66.com/volleyball/World/Men_1994.html|1994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 8강[*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원래 축구의 [[FIFA 월드컵]]과 비교할 수 있는 최고 권위의 국제대회지만, [[대한민국]]은 줄곧 경기 날짜가 [[아시안 게임]]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 병역 특례와 함께 종합대회 우선인 정책에 밀려 세계선수권에 제대로 팀을 구성해 나간 적이 별로 없다. 그것 때문에 국제배구연맹(FIVB)에서 1년간 국제대회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가 간신히 철회한 적도 있다. 그런 팀으로 이끌어 낸 8강이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있는 성적임에도 이 성과는 배구계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1978년]] 4강 이후 세계선수권 최고의 성적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1995_FIVB_Volleyball_World_League|1995년 월드리그]] 6강 진출 때 주전 세터로 활약할 정도로 국제대회에서도 경쟁력이 있었던 세터였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Shin Young Chul)으로 베스트 세터(Best Setter) 상을 [[https://volleybox.net/yong-chul-shin-p1860/awards|세 번이나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1991_FIVB_Volleyball_World_League|1991년 월드리그]], [[https://en.wikipedia.org/wiki/1991_FIVB_Volleyball_Men's_World_Cup|1991년 월드컵]], [[https://en.wikipedia.org/wiki/1994_FIVB_Volleyball_World_League|1994년 월드리그]] [[경기대학교|경기대]] 졸업반 때 터진 스카우트 파동 때문에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럭키금성]],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 고려증권 다 못 가고 만년 하위 팀인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한국전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영철의 입단으로 한국전력은 만년 하위 팀에서 조금 더 좋은 팀이 되었으며, 그가 군 복무를 위해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1992년]]에는 상무 배구단 역사상 유일한 슈퍼리그 우승을 했을 때 그 핵심 멤버였다. 그러나 그 때를 제외한 커리어 내내 국내에서 신영철은 그야말로 꼴찌 팀을 홀로 이끄는 존재였다. 한국전력의 코치로 일했을 때부터 신영철과 인연을 맺었던 [[신치용]]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삼성화재]] 감독은 부임하면서 그를 플레잉 코치로 영입하여 한국전력에서 신영철을 빼오고[* 창단 직후 한국전력의 이적 동의를 얻어 신영철을 데려왔지만 다른 팀들의 반발이 일자 1996-97 슈퍼리그에는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1997-98 슈퍼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미 그 때 30대 중반의 나이에 무릎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신영철은 팀의 우승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고[* 1998년의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삼성화재]]는 나쁘게 말하면 용병급 실력자 [[김세진]], [[신진식]] 2명의 뻥배구로 우승하다시피 했다. 위에 서술하듯 신영철의 강점은 낮고 빠른 토스를 앞세운 스피드와 변칙형 배구지만 이는 삼성화재에 맞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하필 상대 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가 그 해만큼은 장신 블로커들 천지여서 수도 없이 [[김세진]], [[신진식]]이 낮은 토스 때문에 블로킹의 제물이 되었다. 김상우, 김규선이라는 좋은 센터진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승했으니 두 선수가 얼마나 압도적인 실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1998-99 시즌이 끝난 후 공식적으로 코치가 되어 신치용 감독을 보좌하게 된다. 발리볼 레전드 [[https://www.facebook.com/kepcovolleyball/videos/1140944889288155/|컴퓨터 세터 신영철]] 편에서 선수 시절의 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다. [[https://youtu.be/IPT77f-tGZk?si=PlgG5qC_3qVdqKpc|1991년 영상]](배번: 6)도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