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승훈 (문단 편집) === 청년기 (1986 ~ 1990) === 1985년 대전대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재수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경영학과를 86학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음악과 관련해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신승훈은 충남대학교 통기타창작곡 동아리인 ‘팝스우리’[* 훗날 1집에 수록된 '두 번째의 사랑'과 '그대의 마음은'을 작사, 작곡하고 '그대여 안녕'을 작곡한 백병교를 이 동아리에서 만났다.]에서 활동을 함과 함께 통기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당시 대전에서 유명했던 PJ카페에서 돈 맥클린의 Vincent와 앨버트 하몬드의 For the peace of all mankind를 불러 바로 합격했다고 한다.] 훗날 인터뷰에 의하면 카페뿐만 아니라 음악 감상실, 호프집, 피자집, 미용실, 수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음악감상실에서는 본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모창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유 말고도 다른 가수들은 어떻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도 연습했다는 듯. 참고로 남녀 듀엣곡도 가능하다. 단, 동시에 부르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미용실에서 노래를 할 경우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손님들이 노래를 듣지 않아 소리를 지르는 선곡을 해야 관심을 갖고 듣는다고 한다.], 이 때의 레파토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후 꾸준히 인기가 상승했는데 당시 대전에서 신승훈이란 이름을 다 알 정도였다고.[*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팬레터가 보통 연예인급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명세 덕분에 당시 성현기가 진행하는 대전 MBC 별밤의 보조 MC와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이때 즈음에 데뷔곡인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작곡했다고 한다.[* 신승훈은 음악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전혀 없었던터라 자신이 작곡한 곡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불렀는데 3층 옷가게 아주머니가 내려와 누구 노래냐며 물어보는 걸 보고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고. 데뷔했을 당시에도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아 데뷔할 생각을 했지 본인이 쓴 노래가 타이틀곡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후에 대전에서 열린 이문세[* 후에 둘은 굉장히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되는데, 방송만 나오면 아웅다웅 티격태격한다. 그리고 가요계의 대선배가 된 신승훈이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 선배이자 신승훈이 깐족거릴 수 있는 선배이기도 하다.] 콘서트와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코러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영록이 아파서 대신 신승훈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당시 '전영록과 비슷하게 불러달라'라는 부탁에 코러스를 모창했다고 한다.] 그러던 신승훈은 본격적으로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앨범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수가 되겠다며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고, 결국 3개월동안 라면만 먹고 버티다가 장이 꼬여 다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때 슬럼프를 심하게 겪어서 처음으로 '가수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고.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대전에서 꾸준히 통기타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울에 있는 기획사 6군데에 데모테이프를 돌렸다가[* 그 중 한 곳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저음'''이라고 거절당했으며, 또 다른 기획사에는 당시 발라드는 저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는데 처음부터 지르기 때문에 거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작사가 신재각[* 신승훈 2집 수록곡 <영원히 사랑할거야> 작사가]에게 눈에 띄어 김창환을 소개받았고, 본격적으로 가수 데뷔를 준비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