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센구미 (문단 편집) == 검술 실력 == 신센구미의 목적 자체가 낭인과 존황파 지사의 수색 및 체포와 순찰, 경비 등의 경찰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원들의 검술실력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화기가 널리 퍼진 시기에 1:1 대결에서나 어울릴 정통적인 검술 수련을 했던 것은 당시 무사들은 기본 복식으로 길거리에서 [[일본도]]를 차고 다녔기 때문. 미디어의 영향으로 일단 베고 보는 인상이 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찰과 유사하게 체포가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범인이 저항하거나 체포가 힘들 경우 살해로 넘어갔다. 이케다야 사건에서도 7명을 죽이고 4명을 부상, 23명을 체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선조=[[천연이심류]]'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실제 신선조는 천연이심류는 소수고 [[북진일도류]]나 [[신도무념류]] 등의 유명 [[검술]]의 목록, 면허자가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다. 검술 사범만 해도 7명 중에서 천연이심류는 오키타 소지 한 명뿐이다. 신선조 창립의 주요 간부들이 천연이심류라서 마치 천연이심류가 신선조를 대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온갖 다양한 유파들이 다 들어가 있다. 단, 야마나미, 나가쿠라, 사이토, 토도, 하라다 등 초기 간부 중 상당수는 무술 유파는 다르더라도 시위관 도장 자체와는 긴 인연을 가졌다는 증거도 남아 있다. 이는 시위관이 당시 '감자 도장'이라 불리우는 시골 도장으로서 지금으로 따지면 마을 청년회 같은 느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젊은이들이 몰려와서 교류하고 숙식도 하면서 대련하고 마을의 큰 일이 있을 때는 나서는 곳이기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은 유파를 가리지 않고 머물렀던 것. 최근에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유명해졌지만 [[검호]]에 들어가는 인물은 그다지 없다. 원래 시절 자체가 이미지와는 다르게 칼질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 다만 예외적으로 교토 등지에서는 암살같은 게 일어났는데 이런 사람들을 검호라고 부르기는 무리가 있었고, 당시 유명 유파의 검객들은 그냥 도장 운영하고 타류 시합이나 하면서 이름 날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카츠라 코고로 같은 경우도 에도 3대 도장인 신도무념류 연병관에서 면허를 획득한 검사이기는 하지만 시합으로 유명세를 떨쳐 검호라 불리고, 검사의 객관적인 실력은 1:1로 결투를 하지 않는 이상은 누가 강한지 판별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문제는 신선조가 1:1로 싸운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상식적으로 치안유지가 목적인 신선조 입장에서는 다수로 소수를 제압하는 건 전술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산조제찰 사건에선 8인의 적을 상대로 34명을 준비했고, 내부 숙청인 고료에지 사건에서도 7명을 상대로 40~50명이 대기했다. 집단 다구리만 잘하고 실제 실력은 별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주된 원인. 하지만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경찰이 동원되는건 지금 시대에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당시 시대를 산 증언과 훨씬 적은 수로도 전과를 올린 경우가 있어서 딱히 검술 실력을 폄하할 근거는 없다.] 이렇게 기준을 잡기 어렵다보니 당시 실력을 평가하는 주된 기준 중 하나는 죽도 시합이 되었다. 그런데 죽도 시합의 경우 실전과의 괴리가 있고 죽도 수련을 안 하던 유파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유명한 히토기리들도 주로 암살을 하다보니까 죽도시합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죽도에 대비되는 실전 검술이란 인식이 있는데 암살이나 집단 린치는 그 자체로 전술적 우위를 담보해 주기 때문에 이걸 기준으로 검술 실력이 마냥 우위라고 보기도 힘들다. 당대에는 격검과 타류시합이 유행했기 때문에 거기서 실력을 보이면 잘쳐주긴 했는데, 현대에 와서는 검도가 스포츠화된 것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류를 좀 더 실전적으로 쳐주는 분위기라서 죽도 대련에 따라 누가 강했냐 약했냐고 하면 현대인들의 경우 못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 사실 현대인들이 유희적으로 실력 비교하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이런 연유로 그 당시 누가 더 강했나는 데이터도 없을 뿐더러[* 일본에서 있었던 무사시 논쟁에서 무사시를 옹호하던 키쿠치 간이 "도쿠가와 시대에 5회, 10회라도 진검시합을 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을 정도로 무사시나 이토 잇토사이 노부쓰나 등의 몇몇 사례를 빼면 진검 대결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무사시나 이토 잇토사이의 경우에도 이들의 진검시합이 진짜로 있었는지에 대한 교차검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실.], 당시 검으로 사람을 벤 무사들 중 이름이 남은 것은 신센구미나 일부 히토기리로 유명한 인물들 외엔 거의 없을 정도로 진검으로 죽고 죽인 것 자체가 일부 사례일 뿐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신세구미나 시현류가 강한 평가를 받긴 하는데, 시현류도 [[발도 돌격#s-1.1|##]] 여기서 보듯 현대의 유명세로 퍼지게 된 서남전쟁의 상황도 매우 특이한 경우고, 교토 칼부림 또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일어난 예외적 상황으로 이들이 무슨 1:1 시합을 한 게 아니다. 일본 검술 유파가 700개 가까이 되었다고 하지만 대체로 병법 3대 원류에서 나와서 자기들끼리 섞이고 개량되고 했기 때문에 족보로 보면 다 형제뻘이다. 시골 검술이라 무시받던 천연이심류도 가시마 신토류가 그 기원이고. 사실 일본 검술사에서 보자면 독보적인 인물이나 유파들은 따로 있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야규 무네노리]], [[츠카하라 보쿠덴]] 등. 이들은 전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도한 것으로 유명한 검객들이다. 중앙정권 차원에서 인정된 사람들인 것. 한마디로 누가 더 객관적으로 강했냐는 명확하게 답이 없는 상태. 그래서 신선조 전원이 마치 그 당시 최강의 달인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무리가 있고, 또 1:1로 싸우지 않았거나 주류 검사들이 아니어서 별로였단 것도 맞지 않다. 신선조의 검술은 다수의 대원이 유명 유파의 면허, 하다못해 목록은 소지하고 있었고 당시 치안 유지를 하려면 검술 실력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수준급에 오른 검사가 많았다 정도로 볼 수 있다. 동료끼리의 진검승부는 누군가가 조직을 빠져나와 맞부딪히지 않는 한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대련 등의 요소로 실력을 미루어보면, 가장 유명한 것이 1번대 대장 [[오키타 소지]]이다. '죽도 대련시에, 부장인 히지카타 토시조나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같은 대장인 이노우에 겐자부로, 토도 헤이스케를 어린애 취급할 정도이며, 실전에서 부딪히면 스승인 곤도 이사미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의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가쿠라 신파치가 평했다고 한다. 조직원 모두가 난다긴다 하는 신센구미, 그중에서도 대장급들까지 어린애 취급할 정도였다는 건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실력 자체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였던 듯 하다. 3단 찌르기로 유명하다. 오키타 소지가 너무도 유명하여 다른 실력자들이 묻히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으로 스타덤에 오른 내부숙청과 암살을 맡은 전문살수인 3번대 대장 [[사이토 하지메]]가 있다. '아돌'의 모델이 되었을 '좌편수일본돌(左片手一本突き 왼 한손 찌르기)'가 유명한데, 나가쿠라 신파치는 '오키타(소지)는 맹자(달인)의 검, 사이토(하지메)는 무적의 검'이라 평했다고. 위에서 다른 이들의 칭찬만 해대는 2번대 대장 나가쿠라 신파치 또한 실제로는 엄청난 실력자였는데, 신센구미 대원이자 훗날 신센구미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낸 아베 쥬로(阿部十郎)는 '(검술실력은) 으뜸이 나가쿠라(신파치)요, 버금이 오키타(소지), 세 번째가 사이토(하지메)였다(一に永倉、二に沖田、三に斎藤の順)'라고 평했다. 나가쿠라는 용비검(龍飛剣)이라고 이름 붙인 기술[* 하단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위로 상대방의 검을 튕겨 올리면서 아래로 베는 기술.]을 특히 잘 썼다고 한다. 아베 쥬로는 감찰이자 암살임무를 주로 맡았던 오오이시 쿠와지로[* 사카모토 료마 암살의 죄목으로 참수당했다.]에 대해서도, '신센구미에서 최고로 위협적인 검객'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별명 또한 '살인귀 쿠와지로'로, 이토 카시타로를 위시한 수많은 암살 및 살해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신센구미 편성 초기의 강자인 [[핫토리 타케오]]는 검술, 유술, 창술 등 무술 전반의 달인이며 [[이도류]]를 사용했다고 한다. '국중 최강(局中最強)'이라 일컬어졌다고 하나 이토 카시타로와 함께 조직을 나간 후, 아부라노코우지사건(油小路事件)에서 이토 카시타로가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되고 유해가 방치[* 실은, 이토 세력을 전멸시키려는 신센구미의 함정.]되자 이를 찾으러 갔다가 신센구미 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분전 후 살해당했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상사의 유해를 찾으러 갔고, 결국 그 함정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최강의 사나이. 이케다여관 사건에서 극소수의 기습으로 2층에서의 초기전투를 주도하였던 국장 콘도 이사미의 검술 역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이 밖에 소설 미부기시덴(壬生義士伝)으로 유명해진 [[요시무라 칸이치로]]가 있다. 북진일도류 면허에 격검사범이긴 하지만, 소설과 영화에서의 모습은 각색이 가해진 것이고, 실제 자료가 희박하여 근거가 부족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