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바빌로니아 (문단 편집) === 멸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facts-scythians-warfare_9-min.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allofbabylon.png|height=300]]}}} || || {{{#E4C77E 오피스 전투[* [[키루스]] 대왕과 나보니두스가 격돌한 전투로, 신바빌로니아 군대가 대패하면서 신바빌로니아의 운명을 종결지었다.]}}} || {{{#E4C77E 바빌론에 입성하는 페르시아 군대}}} || 기원전 549년에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그 유명한 대왕 [[키루스 2세]]가 종주국인 [[메디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속국 관계를 끊어내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본격적인 대제국으로 끌어올렸다. 키루스 2세는 [[엘람]]과 [[구티 왕조|구티인]]들까지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영토를 끝없이 넓혔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를 멸망시킨 지 10년 만에 인근의 신바빌로니아를 새로운 타깃으로 정했다. 다만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내내 동방의 중심지였고 메디아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한 페르시아는 변방에 불과했으므로 신바빌로니아가 당장 국력이 밀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 반도의 부유한 [[리디아 왕국]]을 집어삼키고 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고, 신바빌로니아 역시 무기력하게 무너지게 된다. 나보니두스 왕은 바빌론은 아들인 벨사자르에게 맡기고 직접 출진해 키루스를 막으려고 했으나 '''오피스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실패했다. 나보니두스는 보르시파로 도망간다. 10월 12일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돌리면서까지 수도 [[바빌론]]을 공략했고, 덕분에 키루스 2세는 아무 저항 없이 바빌론에 입성할 수 있었다. 나보니두스 왕은 키루스 대왕에게 항복했고,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성벽과 마르두크 성벽에 구티인 병사들을 세웠다. 다만 마르두크에게 바치는 종교 의식이나 기본적인 생업 활동들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여 바빌론 사람들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키루스 2세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들의 적법한 계승자를 자처했으며, 자신이 불경한 나보니두스에 대한 마르두크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빌로니아를 포용하려고 했다. 이같은 포용 정책이 어떤 효과를 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찌 되었든 바빌로니아는 이 이래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멸망한 이래 다시는 메소포타미아 토착민족 출신의 왕조가 바빌론에 세워지지 못했다. 참고로 이때 [[바빌론 유수|바빌론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성경》에 따르면 최후의 왕 벨사자르(벨사살)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해오는 것도 모르고 성대한 만찬을 흥청망청 즐기다 그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성경》 외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도 그날 밤, 바빌론 사람들이 아주 성대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고 나오고,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인 [[크세노폰]]의 기록 역시 이와 거의 같다. [[20세기]]에 들어 출토된 소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이 제대로 된 [[시가전]] 한 번 없이 함락당했다고 한다. 물론 공식적인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자르는 부왕에 버금가는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공동 통치자 혹은 대리 [[섭정]] 같은 존재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그의 저작 《아피온 반박문》에서 인용한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론 사제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함락이 있기 전 나보니두스는 키루스 2세에 맞서 출정했으나 오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제국 남쪽의 보르시파란 곳으로 달아났으며 바빌론이 함락당한 후 키루스 2세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예전에 벨사자르는 가공의 인물로 치부되었으나 [[쐐기 문자]] 점토판 유물들이 계속 출토가 되면서 그가 실존했음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그가 바빌론이 함락될 당시에 그 도시에서 나보니두스에 비견되는 왕권을 휘두르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보니두스는 재위 초기부터 남쪽 아라비아 지역에 관심을 가져 '[[타이마|데마]]'라는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영구 복귀하기보단 데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따라서 왕이 부재하게 된 바빌론 시는 애초 원정 당시 왕권을 대리했던 벨사자르가 계속해서 대리 통치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도 분명 데마 원정 직전, 맏아들에게 대리 통치를 맡기고 신바빌로니아 제국 각지의 군대에게 그를 따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30년도 못 가서 아주 허망하게 멸망하고 마는데, 이후 나보니두스의 또다른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칭 '네부카드네자르 3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즉 [[황제]]) [[다리우스 1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신바빌로니아를 계승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바빌론은 계속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수도이자 [[최대도시]]로 남아 있다가 [[기원전 4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다시 바빌론을 아르가이 왕조 [[마케도니아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붕어하고 그 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바빌론의 인근에 '[[셀레우키아]]'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바빌론은 쇠락했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바빌론]] 문서 참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멸망했으나 칼데아인들의 정체성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시리아인]] 문서 참고. 참고로 고바빌로니아를 세운 [[아모리인]]과 신바빌로니아를 세운 [[칼데아인]]은 서부 셈계 민족에서 나왔다는 점만 빼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러나 아모리인들은 칼데아인을 지배할 때 어느 정도의 자치를 주었고, 칼데아 지역에 대해서는 딱히 강압적으로 통치하지도 않았기에 칼데아인들 입장에서는 고바빌로니아 제국에 딱히 완전한 반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기원전 12세기에 아모리인들은 사라지고 칼데아인들만 남아 있었으나 칼데아인들도 문화적으로 일부는 고바빌로니아에 동화된 모습도 있었거나 바빌로니아인으로 정체성이 동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바빌로니아의 후손 및 후손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문화 역시 고바빌로니아를 계승했기에 칼데아 바빌로니아인들이 세운 바빌로니아를 '신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