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바빌로니아 (문단 편집) == 문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eobabylonianjerusalemchronicle.pn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80px-Striding_lions_-_Processional_Way_of_Babylon_-_Pergamonmuseum_-_Berlin_-_Germany_2017.jpg|height=300]]}}} || || {{{#E4C77E 신바빌로니아의 점토판[* 참고로 신바빌로니아 시대 [[예루살렘]]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 {{{#E4C77E 바빌론의 '행진의 거리'를 이루던 벽돌들}}} || 신바빌로니아의 법은 [[바빌로니아|고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었다. [[성문법]]을 채택했던 고바빌로니아와 똑같이 신바빌로니아도 [[살인]], [[강간]]과 같은 중범죄들은 극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법 조항들을 점토판에 새겨 남겼고, [[횡령]]이나 도둑질, 강도, 유산 상속과 같은 사회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법령들이 따로 존재했다. 참고로 신바빌로니아에서 대부분의 범죄에 대한 처벌은 금이나 은을 지불하는 선에서 끝났다. 그나마 [[불륜]]이나 [[반역죄]] 정도가 처형이 될 만한 범죄에 해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불륜에 대해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여서 실제로 처형이 집행된 경우가 많지는 않다고 전해진다. 다만 반역죄에는 얄짤 없어서 반역을 모의하다가 걸리면 무조건 사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방의 귀족, 그리고 원로들이 [[법원]]과 [[판사]]의 역할을 맡았으며 대도시 규모의 법원들에는 왕족들이 판사로 부임해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문화나 조각 등에 있어서는 이전 수메르나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비해서 정교한 면에서는 약간 퇴보한 면이 있었다. 무력을 숭배했던 [[아시리아|신아시리아]] 제국의 영향을 받아 이전에 비해서 섬세한 정도가 떨어진 것이다.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었던 인장들의 조각들이 이전 수메르나 [[아카드 제국]] 시대에 비해서 훨씬 투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 주제 역시 사냥이나 대규모 전투처럼 전통적인 아시리아 주제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참고로 당시 수메르의 전통 인장은 독특하게도 겉면에 양각을 한 원통 모양이었고, 이 원통을 점토판 위에 굴려서 인장에 새겨진 문양을 그대로 찍어내는 방법을 썼다. 다만 신바빌로니아 시대 이후로 점차 이런 방식의 인장은 사라졌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도장 형식의 인장들이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폭압적인 통치를 받던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다시 신바빌로니아 덕분에 해방된 이후, 신바빌로니아는 옛 수메르-아카드의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일상 언어로는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으나 여전히 이전에 썼던 [[아카드어]]가 공식적인 행정 언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의 옛 수메르-아카드 문화에 대한 동경은 거의 종교적인 수준이었다. 특히 옛 시절에 메소포타미아를 한 차례 통치한 적이 있었던 아카드 제국과 고바빌로니아 제국에 대한 동경이 강했다. 예를 들어 건물 공사 도중 옛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의 [[석상]]이 발견되자 이를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새로운 신전을 지어 바치기도 했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나람신]] 대왕의 석상을 찾기 위해서 몇 차례나 발굴 작업을 하도록 인부들을 독촉하기도 할 정도였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공주들을 달의 남신인 [[난나(메소포타미아 신화)|난나]]의 여사제로 만드는 사르곤 시절의 전통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노예제]]는 당연히 존재했으며 노예는 신바빌로니아에서 필수적인 계급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대우가 안 좋지는 않았다. 물론 노예는 노예인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산 것은 아니었고 주인에게 언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는 점은 같지만,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부려먹힌 [[로마 제국]]의 노예와는 달리 신바빌로니아 사회에서 노예는 꽤나 귀중한 인적 자원으로 취급받았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몸값이 일반 노동자의 몇 년 임금에 달할 정도로 그 값이 비쌌기에 함부로 죽을 때까지 마구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정복 활동을 통해서 외부 도시들에서 잡혀온 전쟁 [[포로]]들로, 여성들의 경우에는 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주인댁의 아이들을 봐주거나 빨래를 하는 등 기타 잡일들을 했고 남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주인의 [[비서]]로 일하면서 능력이 좋으면 주인 대신 [[무역]]에 종사하거나 [[세리]]로 일했다. 주인들에게는 노예를 입히고 먹일 의무가 있었기에 노예를 두는 것은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부 노예주들은 노예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거나 가치를 높여 비싸게 팔아먹기도 했다. 노예들은 돈을 모아 제 주인에게 '자기 자신을 빌리는' 형식으로 부분적인 자유를 살 수 있었으나, 완벽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9e44377ce061987bd0a8cb2540c30ca.jpg|height=25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bylon3d.jpg|height=250]]}}} || || {{{#E4C77E 바빌론 왕궁 3D 복원도}}} || {{{#E4C77E 바빌론을 흐르는 [[유프라테스강|{{{#E4C77E 유프라테스강}}}]]}}} || 신바빌로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건축]] 분야다. 화려한 건축 문화 덕분에 현대인들 사이에서는 바빌론이 거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으로도 굳어져 버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바빌로니아의 군주들은 거대한 궁전들과 신전, 그리고 [[지구라트]]들을 수없이 지었고, 개중에서 수도 바빌론의 지구라트, [[행진의 거리]], 성벽 등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이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거대한 지구라트들 중 하나로, 당시 깡촌에 불과했던 [[유다 왕국]]에서 끌려온 [[유대인]]들은 이 지구라트를 보고 하늘에 닿기 위해 인간이 쌓았다는 [[바벨탑]]을 상상했을 정도였다. 당시 바빌론의 구조는 꽤나 반듯한 사각형 모습의 대도시로, 중앙에는 마르두크의 지구라트('''[[에테멘앙키]]''')가 있었으며 도시 한가운데를 [[유프라테스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중앙 지구라트의 높이는 대략 66m 정도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높은 편이었으며, 꼭대기의 신전은 푸른 유약 벽돌로 지어져 있었으며 내부의 성소에는 순금으로 만든 마르두크의 신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중앙 성벽 인근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에 세운 거대한 왕궁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이 점점이 흩어져 세워졌다. 특히 푸른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벽돌 건축물들이 굉장히 유명한데, 이 푸른 유약 벽돌들을 굽는 것이 워낙 어려웠기에 푸른 벽돌은 오직 가장 중요하거나 신성한 건물들에만 따로 썼다. 가장 대표적으로 바빌론에 입성하는 외부인들에게 바빌론의 첫인상을 심어주었던 [[이슈타르의 문]]과 주변 성벽들을 푸른 벽돌들로 쌓았으며, 왕궁과 지구라트의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 등을 푸른 벽돌로 지었다. 푸른 벽돌들 사이 사이에는 황색 유약을 발라 만든 금빛 벽돌들을 이용해서 용과 사자 등이 새겨진 조각들을 넣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참고로 이 이슈타르의 문을 이루던 벽돌들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바빌론 유적에서 통째로 들어내서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재조립했고, 현재는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꽤나 축소된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바빌론 유적에 이슈타르의 문을 다시 복원해서 지어놓았으나 페르가몬의 원본과 비교하면 꽤나 조잡해 보일 정도로 복원의 수준이 형편없다. 보통 신바빌로니아 건축이라고 하면 궁전이나 신전, 성벽처럼 공공 건물 등만이 남아 있으며 일반 평민들이 살았던 가옥들에 대한 연구는 그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흙 따위로 지었던 일반 가옥들이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풍화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이 따로 연구해본 바에 따르면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일반적인 가옥의 형태는 중앙에 중정이 있고 그 주위를 건물들이 사각형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중정을 둘러싸고 있는 벽들 각각의 면에는 중앙에 문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이 문을 통과하면 여러 크고 작은 방들로 통했다. 대부분의 집들은 입구가 남동쪽이나 북서쪽, 이 둘 중 하나에 나 있었고 가장 큰 방인 거실은 보통 남동쪽에 있는 구조였다. 가옥들의 외벽에 장식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무더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창문 같은 것은 내지 않았다. 높은 지위의 귀족이나 관리들은 대규모 저택을 짓고 살았으나, 일반적인 평민들은 가옥의 담장마저 공유할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 살았다. 가옥들의 재료는 햇빛에 말린 진흙 벽돌이었으며, 지붕에는 목재 서까래를 얹은 후에 짚과 진흙을 섞어 지붕을 올렸다. 이슈타르 문에 쓰였던 것처럼 구운 유약 벽돌은 비쌌기에 물이 직접적으로 흘러가는 곳이나 돈이 많은 집안들만이 제한적으로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