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민주공화당 (문단 편집) == 상세 == [[김종필]]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신당 창당을 준비하자,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들이 조직했던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8명과 지역조직 대부분이 합류하여 세를 불렸다. 1987년 10월 창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김종필]]을 당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종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8.1%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4위를 기록하며 예상대로 부진했다. 구 한국국민당 지지층의 상당수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여파로 노태우로 쏠리는 바람에 기대했던 만큼의 득표율을 올리지 못한 것(...) 그러나 김종필의 대선 출마의 진정한 목적은 안정적인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성공적으로 정치에 복귀하는 것이었고 이런 측면에서는 성공한다.[* 선거 뒤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의 첫 공식발언은 '''당락에 관계없이 우리는 승리했다.'''] 대전·충남 지역에서만큼은 압도적 1위를 기록하여 전무후무 충청 [[지역주의]]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충남 18개 지역구 중 13석을 휩쓸었고, 서울 3석, 경기 6석, 충북 2석, 강원 1석, 경북 2석을 얻고 전국구에서는 8석을 얻었다. 총 35석을 획득하였고 민정당의 전횡과 민주-평민당 간의 여전한 분열에 실망한 충청권 유권자들을 흡수하면서 득표율도 15%를 기록, 크게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한 신민주공화당은 제4당으로서 여소야대 국회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원내 재적 299석 중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을 가져간 상황에서 공화당은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 진행 순서 |||||||| [[1990년]]: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과 과정 || || 1 || [[민주정의당]]([[1981년]]) || [[통일민주당]]([[1987년]]) || '''신민주공화당'''([[1987년]]) || || 2 |||||| [[민주자유당]](1990년) || 이후 평민당, 민주당과 함께 노태우 정권을 견제했다. 그러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기는 했지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박쥐같다는 평을 많이 받았고 양자분열로 지기는 했다만 어쨌든 민정당이 노태우 이후의 뚜렷한 차기 대권주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두고 있었던 평민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김종필의 경우 유력 차기 대권주자로 보기에는 지지율이 낮아 잠룡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터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지지층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와중에 민정당이 내각제 개헌을 무기로 김종필과 산하 의원들을 유혹하자 합당을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모두에게 부정적이던 신민주공화당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제압하고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함으로써 자동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