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방 (문단 편집) == 구조 == 본래 중국에서 방이란 성 안에 구획된 거주지역을 일컫는 용어이다. 중국의 성은 여러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방장제'라고 한다. 원래 북위의 수도에서 피정복민들과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인데 수도의 각 구역을 직시각형 모양의 방으로 구분해서 각각 성곽을 두르고 2개 또는 4개의 출입문을 만들어서 일정 시간마다 출입을 통제하는 방식이다.각 방장 사이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대로가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소요 발생에 대비한 것이었다. 특정 민족, 특정 계층의 소요가 수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막고 진압을 위한 군사들이 자유롭고 신속하게 통행할 수 있게한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다양한 출신의 민족들이 거주하는 대도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장제는 송대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각 방에는 방정이라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방이란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을 가리킨다. 즉 신라인만의 마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도시]]의 일부분 구역이 신라방인 경우가 많았다. 신라방의 방정은 신라인이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방의 책임자가 총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자치행정기관이자 신라인을 위한 숙박시설인 신라소도 있었다. 신라원이라는 사찰([[절(불교)|절]])도 많았는데, 장보고가 세운 절로 [[엔닌]] 대사가 방문한 적산원赤山院(적산법화원)이 유명하다. 전통시대에는 대형 사찰은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는 숙박시설을 겸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왕이 지방에 나가면 사찰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인 사찰들은 신라인 여행자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더불어 적산법화원이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다는 건 일본 승려 [[엔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데, 귀국명령을 받고도 신라방에 숨어서 이를 피했고,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라소에서 보증함으로써 체류가 허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장보고가 산둥 반도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이 있다. 법화원은 신라·일본에서 온 유학승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신라의 풍습에 따라 음력 8월 15일마다 3일간 축제를 열었으며, 매년마다 여름에는 금관명경, 겨울에는 법화경 등의 경전을 정기적으로 강의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방은 [[산둥성|산동성]] 등주 등 주로 [[바다]] 근처 [[도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와 통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관리가 된 신라인도 다수 확인된다. [[최치원]]이나 [[장보고]]는 좋은 예. 특히 장보고는 적산원등 신라방과 자주 엮인다. 무역에 종사한 신라인으로 이름이 남은 사람들로는 장보고를 비롯해 장영(張詠), 왕청(王請), 이소정(李小貞), 장공정(張公靖), 김진(金珍), 김자백(金子白), 흠량휘(欽良暉), 왕초(王超) 등이 있었다. [[9세기]] [[헤이안 시대]] [[일본]]의 [[승려]] [[엔닌]]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신라방에 거주하는 신라인에 관해서 비교적 자세히 쓰여 있는데, [[양쯔강]] 하류와 [[대운하]]가 연결되는 회하 하류 지역에 신라 상인들이 많이 활동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