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문화 (문단 편집) === [[불교]] ===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때 [[묵호자]], [[아도]] 등의 외국 승려를 통해 일단 전해졌으며, 이 때 불교를 법흥왕 공인 이전에 전래된 불교라는 뜻에서 초전불교(初傳佛敎)라고 한다.[* 아도가 숨어서 불교 전파 활동을 한 지금의 [[구미시]]에 있는 모례의 집에는 현재 [[http://www.ginco.or.kr/silla/|신라 불교 초전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 때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외래 신앙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 대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세속오계|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와 [[의상(신라)|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 하지만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여러 지방 호족에 의해 악용되었고, 특히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 교종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