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돈 (문단 편집) === 정치 입문 이후 === ||<-2> '''신돈의 역대 관직''' || || '''호칭''' ||사부(師傅), 첨의(僉議), 영상(領相) || || '''문산계 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현대로 치면 총리급, 최소 부총리급의 품계로 [[문하시중]]이나 [[상장군]] 중에서도 공이 큰 사람들이 받은 품계다. [[최충헌]], [[안향]], [[정몽주]], [[심덕부]], 구존유([[능성 구씨]]의 시조), 이천([[서림 이씨]]), 홍자번 등이 받았다. 벼슬의 명칭 변동에 대해서는 [[산계#고려]] 참고.] || || '''공신호'''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 || '''직위'''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br]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br]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이상 직위는 공민왕이 내려준 것이다.] [br]판사(判事)[*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나서 자칭한 직위.] || ||<-3> '''신돈의 외국 관직''' || ||<|2> '''호칭''' || '''원''' ||권왕(權王) || || '''명''' ||상국(相國) || ||<-2> '''원 문산계 품계''' ||영록대부(榮祿大夫) || ||<-2> '''원 직위'''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 공민왕을 알현한 계기가 어찌되었든, 왕의 신임을 받게 된 신돈은 1365년 12월, '고려 개혁'의 핵심 인사로서 등용된다.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줄여서 영도첨의라고도 부른다.]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국방부장관 격.]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불교 국가인 고려를 포함한 종교계 모든 일을 관장하는 자리.]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점이나 제사같은 것을 주관하고 날씨 등에 따라 농업 등을 관리하는 자리. 오늘날의 기상청장과는 달리 왕실의 제사까지 관여하는 일종의 사제 역할을 겸한다.]" 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엄청 긴 이름으로는 [[견훤]]이 즉위 전에 사용한 도독명과 [[최충헌]]의 관직명(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 존호(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등이 있다.] 그야말로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집권 초창기에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었다. 신돈 본인이 기득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득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을 포함한 조정 내의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승려 출신이라서 훗날 [[신진사대부]]들에게 엄청 까였지만, 사실 신돈이 권문세족 등 기득권의 입지를 흔들고자 등용한 것이 신진사대부였으며, 처음에는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신돈은 불가 출신이었지만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했으며 고려의 관학인 [[성균관]]도 부활시켜 신진사대부의 세력 강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신돈이 이들과 척을 지게된 것은 신돈 자신이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사들을 숙청하고 난 이후였다. 그러나 신돈은 이런 '무명의 개혁가'를 담당하기에는 부패하고 탐욕하여 점차 신망을 잃었다. 대쪽같이 빈틈을 전혀 주지 않아도 수많은 적과 모함을 만들어내는 입지인데 신돈은 왕의 신임을 믿고 스스로 부정부패와 축재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가장 먼저 그를 불신했다.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죽였는데, 유숙은 본래 정사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그가 지은 시를 볼 때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유숙은 고려 말 학식이 매우 뛰어나 [[이제현]], 홍언박, [[이색(고려)|이색]] 등과 더불어 공민왕 시절 손꼽히던 대[[학자]]였고, 고려 말에 초기 신진사대부의 주축이었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으며 정도전의 경우는 신돈을 가장 먼저 비판했다. 무관 측 핵심 인사였던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했으며 사실상 신돈 자신과 [[이춘부(고려 후기)|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신돈 본인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적을 많이 만들 수 밖에 없는 위치였는데 신돈은 본인 스스로가 부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표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