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덕왕 (문단 편집) === 치세 === 915년 6월, 참포(槧浦, 현재의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의 곡강(曲江) 추정.)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물결의 높이가 20장(丈) 쯤이나 되었는데 3일만에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참포는 당시 신라 4독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중요한 하천이었다. 다만, 두 물결이 3일 동안 서로 부딪혔다는 것이 신덕왕과 반대 세력과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남긴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916년 10월, 큰 [[지진]]이 났다는 기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백두산]] 폭발에 따른 영향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 백두산 폭발이 일어난 것은 946년 전후로 파악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꽤 떨어진다. 그러나 일종의 전조였을 가능성은 있다.] 후삼국시대의 신라 왕들 중에서는 [[경애왕]](제55대)과 함께 선전했는데 916년 [[대야성 전투|대야성에 처들어온 견훤을 막아내기도 했다.]] 덕분에 신라 중앙은 920년 [[합천군|대야성]]이 함락당할때까지는 안전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라가 현 [[경상남도]] 일대인 강주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런 승리는 서라벌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신덕왕은 소율희 등 친[[신라]]계 호족과는 교류했지만 신라에서 벗어나 국가 건설을 자칭한 견훤이나 궁예의 세력을 반란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들과 손을 잡거나 힘을 빌린다든가 하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견훤은 그렇다 쳐도 궁예의 경우, 신라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재위 기간 내내 싸움을 벌였다.] 신덕왕 때까지는 아직 신라의 이름 아래 남아 있는 호족이 많이 존재했는데 이런 기조가 깨지는 건 다음 군주인 [[경명왕]] 때였다. 진성여왕과 효공왕이 그랬듯 당대 민중에게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선종(불교)|선종]]의 고승들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전국 각지의 고승비에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조정에 우호적인 [[호족(한국사)|호족]]이었던 소율희 형제가 다스리고 있었던 [[김해시|김해부]]에는 낭공 선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낭공 선사를 서라벌로 초빙하고, [[남산(경주)|남산]]에 있는 실제사에 머물게 했다. 이 실제사는 신덕왕이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집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낭공 선사를 존중한다는 의미와 선종 불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김해 호족과의 관계 강화 시도로 풀이되고 있다. 4남 1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슬하에 승영(昇英)·위응(魏膺)·효렴(孝廉) 등이 있었는데 박승영은 제54대 [[경명왕]]이 되었고, 박위응은 제55대 [[경애왕]]이 되었다. 조상인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혔고, 나중에 경명왕도 옆에 묻혀 지금의 [[배동 삼릉]]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