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덕왕 (문단 편집) === 즉위 === 신덕왕의 즉위는 신라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후기 박씨 [[왕조]]의 초대 왕이었다는 점. 이는 제8대 아달라 이사금이 죽은 지 수백 년 만에 박씨 왕이 다시 즉위한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반역자인 초왕 유무의 후손인 [[송무제]] 유유가 600여 년 후 유송을 세운 사례가 있다.] 경문왕계가 4대 연속으로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신덕왕 박경휘가 헌강왕(김정, 제49대)의 [[사위]]로 경문왕가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신덕왕은 [[효공왕]] 김요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의 딸이 효공왕의 왕비로 들어갔다. 과거 [[석탈해]]나 [[김미추]]가 전 왕과 성씨가 다른데도 왕위에 올랐던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라의 왕위 계승은 사망한 왕의 자녀 모두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남녀간의 차이보다는 출생의 순서가 계승 순서가 된 것 같다.) 따라서 효공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인 신덕왕이 즉위한 것이 결코 이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인 [[김효종(신라)|김효종]]도 신덕왕과 마찬가지로 헌강왕의 사위인데 여기서는 헌강왕의 왕녀의 출생 순서가 작용하여 박씨인 신덕왕이 즉위했다. 만약 부계 혈족으로만 왕위 계승을 했었다면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인 김효종이 즉위했어야만 한다.] 다만 석탈해나 김미추는 임시로 왕위를 물려받고 다시 원래 성씨에게 왕위가 넘어갔던 케이스지만, 신덕왕은 즉위한 직후, 아들 [[박승영]]을 태자로 삼아서 앞으로도 박씨로 이어진다고, 대내외에 후계 구도를 명확히 선언했다. 이는 진성여왕과 효공왕을 거치며 너덜너덜해진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의해 [[성골]]이 폐지되고, [[진골]] 왕위 계승 체제가 확립되었으면서도 시조묘와 [[신궁]] 등 [[나정]] 주변에서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와 하늘신에 대한 제사는 계속 지내져오고 있었고, 박씨가 신라의 시조로써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계통이 꾸준히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덕왕은 본인에 그치지 않고, 박씨 계승이 그의 아들들에게 이후 계속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신덕왕의 시대에는 박씨가 신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박씨 왕조를 회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동안 박씨가 숙청되지 않고 중앙 [[귀족]]으로써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국왕이 되었던 때가 이미 육칠백 여년 이상 훨씬 넘은 박씨를 칭하며 왕위를 계승하여 계통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 신라의 난맥상을 추측할 수 있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