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계륜 (문단 편집) === 야당의 신진 정치인 시절 === 정계 입문 이후 [[김대중]]이 고향인 [[전라도|호남]]에서, 특히 [[함평군|함평]]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서울특별시|서울]] [[성북구]]에서의 출마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1992년 1월 현직 국회의원인 [[조윤형]]을 제치고 [[민주당(1991년)|민주당]] 서울 [[성북구 을]]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약 3,000여 명의 청년 및 당원들이 운집한 가운데 지역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몇 달 뒤인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국회의원(37세)으로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41.7%였다. 그 후 신계륜은 민주당 [[김대중]] 대선 후보의 노동담당 특별보좌역을 역임했으나,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였고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1993년엔 대한민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후원회(후원회장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결성하였다. 공개모금행사를 실시하고 정치자금을 모두 공개하여 화제를 모았다. 또한 민주당내 ‘깨끗한 정치 실현을 위한 모임’, ‘민주개혁정치모임’ 등에 참여하며 개혁 그룹을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송영길]], [[이인영]], [[임종석]], [[우상호]] 의원등이 함께하는 ‘대안과 실천’이라는 개혁 모임을 창립하고 이를 이끌기도 했다. 한편 [[제14대 국회]]에서 그는 젊은 국회의원답게 의정활동을 매우 성실히 하여 주목을 받았다. 1995년 [[중앙일보]] 국회의원 평가에서, 상임위에서의 발언 1위, 문제제기 1위, 대안제시 1위, 공무원 평가 1위, 종합평가 1위를 차지해 전체 국회의원 중에서 유일한 5관왕을 차지하였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신계륜은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탈당하고 김대중이 새로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서울 [[성북구 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39.2%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당선자는 [[신한국당]]의 [[강성재(정치인)|강성재]]였고, 표 차이는 3천여 표밖에 나지 않았다. 당시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황호산]]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진영의 표가 갈린 것이 패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리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청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김대중의 당선에 기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