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계륜 (문단 편집) == 학창시절과 노동자시절 == 1954년 8월 13일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신원식(申元植, 1920. 12. 7 ~ 2000. 5. 28)과 어머니 [[장(성씨)|흥덕 장씨]](興德 張氏) 장정임(張貞任, 1926. 3. 28 ~ )[* 장흥석(張興石)의 딸이다.]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 계림초등학교와 북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22회)를 졸업하고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동기로는 [[설훈]], [[홍의락]]이 있으며 [[홍준표]]의 행정학과 직속후배였다.] [[행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10월 유신|유신]] 상황에 눈을 뜨면서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생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정권]] 하에서 잦은 체포와 감시 속에 있다가 1976년 강제 징집되어 전방 부대에서 복무를 마치고 1979년에 제대했다. 같은 해 [[10.26 사건]]으로 만들어진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학생운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해 봄 학도호국단을 거부하는 운동 끝에 6년만에 부활한 자주적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월 13일부터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계엄]]령 철폐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 정점에 올라, [[서울역]]에는 무려 15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이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더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준다고 주장하면서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는데, 신계륜은 이에 반대하였지만,[* 이때 신계륜과 함께 회군에 반대한 사람이 바로 서울대학교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과 복학생 운동권의 리더격이었던 [[이해찬]]이었다. 이들 세 명은 나중에 정계에서 재회하였다.] 결국 심재철의 주장대로 이른바 '[[서울의 봄#s-6|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두환]]은 고립된 [[5.18 민주화운동|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정권을 움켜쥐었으며]],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5.17 내란|전두환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5만 명의 학생이 모였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당시 군부는 학생들의 숫자에 질려서 저녁 8시까지 이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군부가 이 수많은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면, 수도 한복판에서 [[킬링필드]]를 만들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이는 [[이승만]]이 하다가 쫒겨났던 일이었다. 그런데 심재철의 주장대로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짐으로써 당시의 학생 운동권은 뿔뿔이 흩어졌고 군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서울역 철수 다음 날인 5월 16일에는, 여러 고대생들과 함께 5.16을 규탄하는 가두행진을 [[고려대학교|고려대]]에서 [[수유동|수유리]]까지 진행하여 철수에 대한 항의의 뜻을 알렸다. 그러나 5월 17일 시위를 중단한지 이틀만에 군부는 전국의 대학에 진주하여 점령하고 학원을 군의 병영으로 삼으며 전국적인 휴교령을 내렸다. 5월 18일 수배를 피해 [[광주광역시|광주]]로 내려갔다가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는 5월 27일 새벽까지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광산구)|송정동]])의 절친한 친구의 집에 머무르면서 광주에서의 학살을 목격하였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차량이 끊긴 월야집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광주에 와 아들의 소재를 물으며 시위대 사이, 그리고 병원의 영안실들을 헤매고 다녔으나, 그는 어머니가 그토록 처연하게 아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알고도 어머니에게 살아있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점령당하자, 다시 서울로 탈출했다. 그런데 “극한적 학원소요 사태와 광주 사태의 배후 조종자 및 주동 극렬 분자”로 지명수배된 가운데 무려 30일을 더 숨어 지내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지독한 고문을 받았음에도 끝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군법회의에서 결국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83년]]에 출옥한 후 나남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그 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여러 해 동안 노동 운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 [[3당 합당]]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91년에 [[이우정(1923)|이우정]], [[박우섭]] 등의 재야동지들과 함께 [[신민주연합당]]의 발기인으로 나서면서 정계에 입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