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경식(야구)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1루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1루수 부문 수상자 (198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BLzRwGYj88T2hMIzLI8li8VI.gif|width=100%]]}}} || 1982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며 [[OB 베어스]]의 원년 멤버로 입단했다. 당시 [[김영덕]] 감독은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 출신의 좌타 내야수 이근식[* 당시 OB에는 2명의 이근식이 있었는데 1958년생 좌타 내야수 이근식은 '''"큰 이근식"''', [[한양대학교]] 출신의 1959년생 좌타 외야수 이근식은 '''"작은 이근식"'''으로 구분했다. 참고로 '''큰''' 이근식은 신경식과의 [[1루수]] 주전 경쟁에 밀려 벤치만 덥히다가 1982년을 끝으로 타율 0.185라는 부진한 성적만 남긴 채 은퇴했고, '''작은''' 이근식은 1986년 까지 주로 내야 백업으로 선수 생활을 유지했다.]을 주전 [[1루수]]로 낙점하고 있었으나, 시즌 초반 이근식이 복통을 호소하며 결장하게 되자 신경식이 대신 1루수로 출장했는데 그날 당시로선 보기 드문 양 다리를 쫘악 찢는 포구 동작과 깔끔한 수비를 선보이면서 이근식을 제치고 단박에 1루 주전을 꿰차며 그 해 0.334라는 높은 타율로 맹활약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KwyxTjwebVgpXZ.jpg|width=100%]]}}} || 188cm, 95kg의 체격 조건[* 프로 원년인 1982년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김용희]](190cm) 다음으로 장신이었다.]으로 당시 [[KBO 리그|한국프로야구]]에서는 보기 드문 축복받은 거구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체격 조건을 살려 앞서 말했듯이 선수 시절 양쪽 다리를 크게 벌려 내야수들의 1루 송구를 포구하는 모습으로 '''[[두루미|학]]다리'''라는 별명을 얻어 많은 인기를 받았다. 당시 어린이들이 1루 수비를 하면서 다리를 찢는 그의 모습을 흉내낼 정도.. 1983년 박철순이 부상으로 경기에 나오지 못하면서 베어스 최고의 인기 선수 타이틀을 넘겨받았으며, 그 인기는 1983년 올스타 최다득표로 이어져 신라호텔에서 최다득표 기념 인터뷰를 한다. 인기에 보답하듯 1차전 홈런과 3차전 결승 타점을 기록하여[* 2차전 인천 경기는 비로 취소.]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어 프린스 자동차를 부상으로 받았다. 이후 [[강영수(야구)|강영수]]를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 첫 해 3할 타율과 최다안타 2위를 기록한다. 1992 시즌 후 삼성이 쌍방울에서 [[정영규]]의 지명권을 받아 오는 조건으로 [[김성길]]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어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했다.[* 특히 쌍방울 이적 첫 해인 [[1993년]]에는 삼성과의 전주 홈 경기에서 2홈런을 쳤다.] 삼성 시절인 1992년 4월 12일[* 대구 태평양전.]에는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1,000경기'''를 출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팀은 연장 끝에 패배. 참고로 이날은 [[일요일]] 경기였다.][* 당시 해태 감독 [[김응용]]과 같은 날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틀 후인 4월 14일[* 사직 롯데전.]에는 역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로 '''1,000안타''' 기록도 세웠다.[* 고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다. 팀도 승리.][* 참고로 첫 번째로 1000안타를 달성한 선수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던 [[김성한]]이다.(1991년 4월 19일 달성)] 수비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여준 반면, 좋은 체격 조건을 가진 1루수임에도 불구하고 장타력은 다소 부족했다. ~~어째 [[서용빈]]이 떠오른다?~~ 전형적인 컨택 & 스프레이 중거리 타자였다. 그러나 주루 실력은 빼어나서 매년 10개 이상의 도루를 했다. 스탯을 놓고보면 수비형 외야수의 스탯이었는데 어째서인지 1루를 보고 있다는 게 특이한 점. 물론 신경식의 1루 수비가 워낙 뛰어나기도 했지만 컨택형에 준족의 타자가 1루를 보고 있다는건 어깨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다만 유독 프로야구 초기에는 신경식같은 호타준족 선수들이 1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삼미 슈퍼스타즈의 [[조흥운]]. 1982시즌에 1루수로서 44도루를 기록하였다.] 삼미도 그랬고 ob도 그랬으니 그 당시에는 그게 정석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원년 선수들 중 포수 [[이만수]], 투수 [[박철순]] 다음으로 [[김성한]]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프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