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간회 (문단 편집) === 해소의 책임론에 대하여 === 워낙에 신간회의 의미가 크다보니 누구 때문에 엎어졌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상단에도 적혀 있지만 워낙에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일단 가장 흔히 거론되고 있는 우파쪽 주장은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가 주도해서 해소했다''' 라는 것. 좀 과격한 입장에서는 노농에 대한 이념 침투를 과신해서,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좌파마저 배제시키고 신간회를 먹으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반대쪽 주장은 당연히 '''자치론으로 기운 지도부 때문에 해소되었다'''라는 것. 사실 양자 모두가 책임이라면 책임이고, 의도라면 의도이지만 해체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일제의 노력'''. * 일제는 초기 협력 관계의 매개가 된 지도부를 모두 [[구속]]하고 신간회가 해소될 때가지 구금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연락할 방법마저 막았다. 또한 해소 후 재창단도 가능할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신간회 해소를 위한 전국 집회를 허용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미 1929년 3월 11일 포고로 신간회의 전국대회를 금지시켰다. 다시말해 [[신간회]] 해소집회는 신간회 창립대회 후 처음 열리는 전국대회이자 동시에 해소대회인셈. ]애초에 신간회의 새로운 지도부가 민족주의계 일색이 되었고, 지회와 유리된 것은 일제가 집회를 금지해서 중앙 집행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신간회를 해소한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이건 집회를 허용해서 모이게 해준 것이다. 물론 다음날 재창단을 한다고 다시 집회를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허용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 '''재창단을 틀어막았다. '''이 때문에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일제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해소를 하지는 않았으나, 신간회가 무너지게 되는데 여러모로 개입했던 정황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