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 (문단 편집) ==== 그리스도교의 견해 ====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문제에 있어 독특한 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는데, 바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풀어서 쓰자면,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악한 것'은 존재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일대일 대응은 되지 않지만, '차가운 것'이 존재할지언정 '냉(冷) 에너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열 에너지'가 존재할 뿐인 것과 비슷하다.] 즉 심지어 [[악마]]라고 할지언정, 타락했다거나 선이 결핍되었다고 표현이 가능할지언정, '순수 악'은 아니라고 이해되며, '선한 유일신이 어째서 악을 창조했는가?'라는 질문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그리스도교는 답변하게 된 것이다. >모든 기예(技藝, techne)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강상진·김재홍·이창우 공역) 1.1-[* 당연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아니다.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과 연결시키기 위해 언급했다.] >---- >선(善)의[* 여기서 말하는 선(善)은 '좋음'과 동일한 의미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많을수록 좋다'를 의미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스어로는 agathon이고 라틴어로는 bonum이다. 물론 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음' 역시도 그리스어로는 agathon이고 라틴어로는 bonum으로 번역된다.] 근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욕구적 이유이며 악은 선에 반대 대립되기 때문에 어떤 악이 악인 한 자연적 욕구에 의해서도 동물적 욕구에 의해서도 의지인 지성적 욕구에 의해서도 욕구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악은 우유(偶有)적으로 욕구되는데 그것은 그런 악이 어떤 선을 수반하는 한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어떤 욕구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자연적 능동자가 박탈(결여)이나 부패(파괴)를 지향하지 않고 형상(形相, 이데아를 말함)을 지향한다. 이런 형상에는 다른 형상의 박탈이 결부된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것의 출산을 지향하는데 이런 출산은 다른 것의 파멸인 것이다.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도 음식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 음식에 동물의 살해가 결부된다. 마찬가지로 간음자가 지향하는 것은 쾌락인데 그 쾌락에는 죄과(罪科)의 추악함이 결부된다. >어떤 선에 결부되는 악은 다른 선의 박탈이다. 그러므로 악이 그것에 결부된 좋음(善)이 그 악에 의해 박탈되는 선 이상으로 욕구되는 것이 아니라면 악은 비록 우유적일지라도 요구될 수 없을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정의채 역) 1.19.9- 또한 이러한 일신교적 이해로 인해서, 왜 선이 악보다 좋은 것인지에 대해 "사람이든 동물이든 악을 원하지 않으니까"라는 답변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간음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음자가 악을 원해서가 아니라, 쾌락이라는 일종의 '선'을 다른 '선'보다 더 욕구하기에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당연하지만 이것이 불륜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톨릭 수도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렇게 생각했을리도 없을 뿐더러, 쾌락으로 인한 선이 가정의 파괴로 인한 선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도 없다.] 유일신과 악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학문적 서술은 [[http://www.newadvent.org/summa/1019.htm|신학대전 제1부 제19문제]]를 정독하길 권한다. 또한 또다른 견해로는 빛과 어둠을 예시로 들기도 한다. 어둠이란 것은 빛의 부재이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이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니, 악 또한 신이 악해서 악한 사람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사이코라서 그런것이 아닌, 선의 절정인 신을 떠나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그럼 왜 기독교인인데 나쁜 사람이 있고, 개신교에선 선한 행실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느냐 할 수 있으나, 전자의경우 명목상 기독교인일 뿐, 신앙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도 있고, 후자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오직 믿음 교리는 구원의 조건이 선행이 아니란 것이긴 하지만 구원을 받았다면 선행을 실천하게 된다는 교리이다. 다시말하자면 착해서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으면 착해지는 것이고 믿는다고 하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제대로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