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흥군 (문단 편집) === [[조선]] === 조선 개국 직후인 1402년,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경기도로 합도하면서 경기도 금주현, 과천현, 안산군이 되었다. 이후 14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호부보다 급이 낮으면서 끝이 -주(州)로 끝나는 고을의 이름을 -천(川)이나 -산(山)으로 바꿀 때 금주에서 '''금천'''(衿川)으로 바뀌었다. 동 시기에 인주(仁州)와 과주(果州)도 각각 인천(仁川)과 과천(果川)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안산(현 시흥시 남부 포함)의 경우는 이미 고려시대에 '안산'이라는 이름이 정해졌기에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개편과는 관련이 없었다. 한편 [[여의도]]는 조선 시기(아무리 늦어도 조선 후기)에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인 1414년에는 금천현과 과천현(현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서울 관악구 남현동/동작구 노량진, 사당동, 동작동/서초구 대부분)이 금과현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가 읍치 선정 문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금천구청]]과 [[과천시청]] 간 교통편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금천현과 양천현(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이 통합되어 금양현이 만들어기도 하다가 1416년에 그냥 원래대로 '금천현'으로 환원되어 굳혀졌다. 다만, 금양현 및 금양이라는 지명 자체는 금천현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1400년대 후반 성종 때 저술된 강희맹의 [[금양잡록]]이 그 예. [[정조(조선)|정조]] 때(1795년)에 명칭이 금천에서 '''고려시대부터 사용해온 별칭을 딴 시흥'''으로 바뀌었다. 시흥이라는 단어는 잉벌노(늠내)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흥으로 개칭과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시흥동에 [[시흥행궁]]이 지어졌고, 정조가 지금의 [[시흥대로(서울)|시흥대로]] 따라 서울(한양)에서 수원까지 행차했다고 한다. 사실 원래는 과천군 쪽에 나있던 길을 시흥군 쪽으로 옮긴 데는 사도세자 처형에 관여한 인물의 묘가 과천에 있는데, 수원까지 행차가는 데 과천을 지나가는 걸 정조가 싫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쉽게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조선시대 시흥군 관아와 시흥향교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특히 군현 관아의 경우 다른 대다수 군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기존의 군현 관아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나 군청을 지어버렸기 때문.(...) 수도권의 경우 [[인천도호부관아|인천]], 부평 정도가 도호부청사 일부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도호부 청사의 상당부분이 초등학교 건립 목적으로 철거되어 남은 것이 이 정도다. [[한성부]]'''조차''' 관아 건물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터만 전해질 뿐이다.(...)] 옛 시흥향교는 일제가 1940년대에 기존의 [[과천향교]]로 통합시키면서 철거되었다. 만약에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양천향교지와 함께 서울시내의 둘 뿐인 향교가 되었을 터. 하지만 [[양천향교지]]도 헐린 건 똑같다. 관아터는 현재 시흥동 은행나무 앞 카멜리아 백화점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시흥 향교는 범일운수 종점에, 시흥행궁은 관악산 신도브래뉴 아파트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