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흥군 (문단 편집) === 분리와 해체, 현재 ===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시흥군의 영역은 [[월경지|동서로 분단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흥군청은 여전히 안양시 내에 위치하게 된다. 동부나 서부로 이전해 버리면 서로 반대편에서 불편해 할 테니...] 이와 함께 현 시흥시 북부 지역인[* 현재의 시흥시의 사실상 모태는 이 소래읍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시 승격 당시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기 때문. 물론 현재에는 소래권보다 정왕권이 인구, 경제력 측면에서 우세한 상황.] '''[[부천시|부천]]군 소래면을 편입'''해왔다. 하필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된 이유는, [[1973년]]에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 곤란해진 {{{#0000ff '''소래면'''}}}[* 덕분에 부천시는 바다에 접하지 않는 내륙도시로 전락해 버렸다.]과 {{{#bb00bb '''계양면+오정면'''}}}을 각각 근접한 {{{#0000ff '''시흥군'''}}}과 {{{#bb00bb '''김포군'''}}}에 이관한 것이기 때문.[* 이외에도 도서 지역(영종면, 용유면, 북도면, 대부면, 영흥면, 덕적면)들은 당시 2개 면([[서해 5도]])밖에 없었던 [[옹진군(인천)|옹진군]]에 흡수되었다. (이후 영종면, 용유면은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인천)|중구]]로, 대부면은 1994년 안산시로 흡수된다.)][* 참고로 오정면은 1975년 부천시로, 계양면은 1989년 인천직할시 북구(현 [[계양구]])로 편입되었다.] 1974년 서면 북부인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7년 시흥군청을 안양시 안양동 674번지(현 삼원프라자호텔 자리)에서 안양동 477번지(현 만안평생교육센터 자리[* 이후 [[만안구]]청으로 잠깐 쓰였다가, 만안구청이 현 위치(구 [[안양시청]])로 이전하면서 만안여성회관으로 쓰였다.])로 이전하였다. 1979년 서면 남부가 소하읍으로,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시읍면 단위의 [[지역번호|통화권]]을 시군 단위 통화권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읍면별로 설정되었던 시흥군 내 여러 통화권들도 아래와 같이 정리되었다. * 소래면[* 1978년에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된 옥길리, 과림리 제외] 통화권 (지금의 시흥시 북부[* 과림동 제외]): 1979년 수용국이 부천전화국으로 변경되면서 인천통화권(032)으로 흡수되었다. * 소하읍[* 1970년에 편입 시작되어 1978년에 서울통화권 편입이 완료된 광명리, 철산리 제외] 통화권 (지금의 광명시 하안동, 학온동, 소하동, 일직동 지역): 관할 전화국이던 광명우체국이 서울통화권(개봉전화국)인 광명리 소재라는 점이 문제되었던지 서울통화권 확장 계획에 따라 1980년에 서울통화권(02)으로 흡수되었다. 한편 광명리, 철산리는 1970년대 초반부터 서울통화권으로의 편입이 진행되어 1978년에 편입이 완료되었다. 옥길리는 과림리(현 시흥시 과림동)와 함께 1978년말에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되었다. 아무튼 이에 따라 가학리, 노온사리의 수용국은 서울 개봉전화국이, 하안리, 소하리, 일직리의 수용국은 서울 구로전화국 시흥분국이 되었다. * 수암면[* 원계획상으로는 안양통화권으로 흡수편입이었는데 오늘날의 안산통화권으로 통폐합되는 것으로 변경.], 군자면 통화권 (지금의 시흥시 남부 및 안산시[* 대부동, 구 반월면 지역 제외]): 1979년 안양전화국 반월공단분국 설치로 새로이 설정된 반월통화권(당시 지역번호 0345. 현 안산통화권)으로 통폐합되었다. * 과천면, 군포읍, 의왕읍 통화권 (각각 지금의 과천시[* 60~70년대에 서울전화에 편입된 주암동 장군마을 제외], 군포시[* 대야동 제외], 의왕시): 1979년, 1980년 즈음에 안양통화권(당시 지역번호 0343)으로 통폐합되었다. 그 중 과천면 지역은 1985년에 안양통화권에서 서울통화권으로 재조정. 한편 시흥군 서면의 광명리와 철산리는 1978년에 서울통화권 편입(1970년에 시작)이 완료되었고 소래면의 옥길리와 과림리 역시 같은 해에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되었다.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은 1981년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참고로 광명 지역은 당시 시흥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당시 소하읍(법적으로는 광명출장소 지역까지 포함)은 시 승격 직전 인구가 15만으로 과대읍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광명출장소의 서울 편입 또는 독자 시승격 여부가 결정나지 않아 갈팡질팡하다가 읍 인구가 그렇게 늘어난 것(...).] '''시흥군의 마지막 '오리지널 시흥' 지역인 광명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시흥의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했다면 이걸 갖다 '광명시' 대신 '시흥시'란 이름으로 승격시키고, 남은 시흥군은 개칭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문제의 [[서울특별시/역사|서면(소하읍)은 서울시로]]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편입될 뻔했으나]], [[서울 공화국|서울 집중 문제]](5공 정부의 위성도시 육성 정책) 때문에 나가리되면서 결국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사실 이때 광명을 '시흥시'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어도 지금과 같은 아스트랄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경부선]] [[시흥역]]은 그대로 [[시흥역]]이었을 것이다(...).[* 이런 가상역사 하에서는 지금의 KTX [[광명역]]의 입지나 위치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 역의 입지가 지금의 광명역과 같았더라면 그 명칭은 '남서울역' 내지는 '일직역' 등이 되었을 것이며, 입지 자체가 지금의 [[금천구청역]]으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금천구청역 근처는 군 부대였기 때문에 군 부대를 몰아내고 거기다가 KTX 역사를 짓는 식으로 했을 여지도 있었을 듯.] [[파일:attachment/시흥시/역사/1982.png]] 1981년 광명시 분리 이후 시흥군 행정지도(1982년).[* 다만, 소래면의 읍 승격이 반영되지 않은 오류가 있다. 또한 반월출장소 지역은 표기는 되어있으나 도 직할 출장소인 관계로 시흥군이 직접 관할하지 않는 것을 고려해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에는 소래면과 의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소래읍 옥길리가 광명시와 부천시에 분할 편입되었고, 계수리 일부가 부천시에 편입되었으며[* 계수동이 시흥시와 부천시 양쪽에 존재하는 이유다.], 화성군 반월면 초평리, 월암리가 의왕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서부의 반월출장소[* 군자면, 수암면과 화성군 반월면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가 [[안산시]]로, 동부의 과천면이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이로서 최종적으로는 3읍(소래, 군포, 의왕)과 2면(군자, 수암)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sih3.jpg]] 1986년의 시흥군. 결국 1989년 군포읍은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승격되고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해당 잔여지역에 시흥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목감동]] 출신의 어느 향토사학자의 기여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흥군 해체 직전에는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들은 군포읍과 의왕읍을 통합하여 시흥시로 승격하자고 주장하였고 안양시 편입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또한 인천시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을 내무부에 요청했지만, 소래읍 주민들은 인천 편입이 아닌, 소래시 승격을 원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0800329213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8-08&officeId=00032&pageNo=13&printNo=13188&publishType=00020|기사]] 또한 부천시에서도 역사성과 생활권을 들어 소래읍의 부천 편입[* 성사 되었다면 부천시는 소래포구와 가까운 해변을 획득해 다시 해안도시로 복귀되었을 것이다.]을 요구하기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7110032921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7-11&officeId=00032&pageNo=15&printNo=13164&publishType=00020|기사]] 다만, 당시 경기도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반대했고, 내무부도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한편 해체 이후 1995년에는 안산 생활권이었던 안산동(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즉 1995년까지 안산동은 안산시가 아닌 시흥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산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다.]과 화정동 일부[* 화정동이 시흥시와 안산시에 모두 존재하는 이유이다.]가 시흥시에서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군자권(거모동, 정왕동 등) 역시 지속적으로 안산시 편입론이 있었으나, 결국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거모동의 경우는 아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안산시 행정구역 경계선이 지나며, 안산시 선부동, 원곡동, 신길동 시가지와 매우 가깝다.'''] 한편 내무부 주도의 인천 추가 확장 차원에서 시흥시도 인천 편입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91100289113014&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9-11&officeId=00028&pageNo=13&printNo=2008&publishType=00010|참고 기사]]) 시청과 시의회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91100289113014&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9-11&officeId=00028&pageNo=13&printNo=2008&publishType=00010|거센 반발]]로 인천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김포군과 달리 주민투표 회부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를 지도로 보고 싶다면 [[http://cheonji.egloos.com/4809501|#이 블로그 참조]]. 이렇게 거의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다보니 원래의 시흥군 중심지인 [[서울특별시|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현재의 [[시흥시]]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생긴 [[시흥역]]은 현 시흥시와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게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시흥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안겨주다가 결국 [[금천구청역]]으로 개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