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헌력 (문단 편집) === 시헌력의 개발 === [[1281년]] [[원나라]] 시기에 수시력(授時曆)이 만들어졌다. 수시력은 이전의 중국 역법과 비교하여 매우 뛰어나서, [[명나라]]가 건국된 뒤에도 수시력에서 계산의 기준이 되는 연도와 일부 수식의 값만 바꾼 채 이름을 대통력(大統曆)이라 하여 [[1368년]]부터 사용하였다. 실질적으로 대통력은 이름만 바꾼 수시력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아라비아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회회력]](回回曆)이 만들어져서 대통력과 병행되었다. 이 시기 역법은 황제의 명령으로 발표된 것이고, 여기에는 학자들이 정한 계산식까지 포함되었다. 계산의 기준이 되는 연도, 그리고 계산식까지도 황명으로 발표된 것이므로 학자들이 계산식을 임의로 수정하거나 오차를 보정할 수 없었다. 수시력-대통력이 쓰이던 수백 년에 걸쳐 오차가 축적되자 역법은 점점 정확성을 잃었다. 1627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즉위했다. 숭정제는 대통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껴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지시하여 숭정력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명나라가 멸망해서 숭정력은 미처 반포되지 못했다. [[청나라]]는 천문학에 밝은 아담 샬을 중용하여, 숭정력을 '시헌력(時憲曆)'[* [[상서]](尙書) 中의 '유성시헌(惟聖時憲)'이라는 문구에서 따옴]이라는 이름으로 [[1644년]] 10월에 반포하였다.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의 계산식을 중국인 학자와 예수회 학자들이 [[케플러의 법칙]]을 받아들여 일부 수정하는 등 변동이 있긴 했지만 시헌력은 청나라가 멸망하는 날까지 사용되었다. 쑨원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뒤, [[1912년]] [[1월 1일]]부터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고 시헌력을 폐지하였다. 이후 시헌력은 전통명절의 계산에만 일부 남았다. 게다가 계산식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현대 천문학의 방법대로 하되, 월과 날짜를 정하는 규칙만 시헌력을 따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