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시 (문단 편집) ==== [[한나라]] ==== ||<:> [[파일:external/www.sanqinyou.com/20110701_234138_465.jpg|width=600]]|| ||<:>한나라 장안성 평면도 || 한나라 때의 장안은 지금 시안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위성 지도로 보면 회색빛인 시안 시가지와 달리 묘하게 방형의 녹색빛이 도는 곳이 있는데, 한대의 장안성 모양과 일치한다. 성벽의 모양새도 일부는 길과 가로수로, 남동쪽은 해자가 온전히 남아있다. 다만 위성지도에서 녹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이 곳이 논밭이 많다는 이야기로, 한나라 시기 문화재는 상당수가 파괴되어 있고 황제가 살던 궁궐 터가 겨우 발굴되고 있는 중이다.], 비단길의 시작점이었다. 장안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전략적 이점들이 전한의 수도가 된 원인이었다. [[한고조]]는 처음엔 낙양을 수도로 삼고자 했다. 이때 누경으로부터 [[관중]]은 수비에 용이하고 과거 낙양을 수도로 삼았던 주나라와 한나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한나라는 전쟁을 하며 덕을 쌓지 못했고 따라서 유사시 관중에 들어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중은 가히 천하의 덜미를 거머쥐고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형국의 요지로서 [[장량(전한)|장량]] 또한 누경의 의견에 지지를 보내며, 관중은 '금성천리(金城千里, 천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나 다름없으며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 곳간의 나라)'이라 표현했다. 한고조는 즉각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지어진 건축물인 장락궁(長樂宮)이었는데, 원래 진나라 때의 건물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토대로 개축한 것이었다. 서쪽으로는 상국 소하(蕭何)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어 미앙궁(未央宮)이 건설되었다. 한 고조 시절 장안은 주로 이 두 궁궐로 이뤄졌고, 아직 성벽이 완전히 세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혜제 시절에 성벽을 완공함으로써, 장안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혜제 이후 즉위한 [[한문제]]와 [[한경제]] 시절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두 황제의 치세에 걸맞게 마땅한 토목공사는 없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장락궁 북쪽에 명광궁(明光宮)을 더했고, 미앙궁 북쪽으론 북궁(北宮)과 계원(桂原)을 추가했다. 무제는 상림원(上林苑)을 지었는데, 그 둘레는 약 300리에 달했다. 무제는 이 모든 궁궐 단지들을 장안 내외에 걸쳐 지었지만, 서쪽 교외에 위치한 건장궁(建章宮)이 가장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한무제]] 시대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구 자체는 낙양이 훨씬 많았다. 장안이 속한 경조윤의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이 중에서 장안의 인구는 25만 명가량), 낙양이 속한 하남군의 인구는 170만을 훌쩍 넘는다.] 이 당시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남쪽이 [[남두육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경제 활동은 주로 도시 북서쪽의 서시와 동시에서 행해졌는데, 두 시장은 위수에 가깝게 위치했다. [[왕망]]이 찬탈하여 전한이 멸망하고, 잠시 [[신]]나라의 수도로 상안(常安)으로 개칭되었으나, [[적미]]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적미군의 폐허를 완전히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후한 시대에 장안은 경조윤(京兆尹)으로 불리었으며 좌빙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과 함께 묶여져 삼보(三輔)라고 칭해졌다. 또 후한 시대에는 장안은 적미에 의해 유린된 이후 복구되지 않아 사실상 폐도로서 있었다. 후한 말기 [[헌제]] 때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일단 우격다짐으로 대충 수도로 복구해 다시 장안으로 옮겼다. 이곳은 비교적 서량과 가까웠으며 이 때문에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자 자신의 근거지인 서량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천도해서 병력과 물자를 쉽게 조달하려 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강족]]과 [[저족]] 등 서량에 사는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동탁이 여포에게 암살되자 [[이각]], [[곽사]]가 난을 일으켰고, 이 '''[[삼보의 난]]'''으로 장안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헌제는 이를 떠나 [[조조]]에 몸을 의탁했고, 조조는 [[쉬창|허도]]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장안은 곧 도시로 복구되어 [[조위]] 서방의 중요 도시로 남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연의의 각색으로 실제 역사에서는 장안 근처를 휘젓기는 했으나 장안성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