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사IN (문단 편집) == 역사 == [[시사저널]]을 퇴사한 기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2006년]] 시사저널의 이철현 기자는 [[삼성그룹]]과 당시 [[이학수]] 경영전략실장에 비판적인 '삼성 2인자 이학수의 힘, 너무 커졌다'라는 기사를 작성해 제출했는데 삼성 고위 관계자들은 이 기자와 이윤삼 편집국장과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에게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기사 게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를 거부하자, 전직 [[중앙일보]] 부회장 출신인 금창태 당시 사장에게 연락을 해 게재를 막으려 했다. 금창태 사장은 전력~~과 밥줄[* 기자사관학교로 꽤나 명성을 날리던 시사저널이 굳이 유력 일간지에서 사장을 초빙해올 이유는 광고영업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상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와 친분관계가 있었기에 데스크에 이 기사를 빼라고 지시했는데 [[기자]]들이 이에 반발하자 편집국을 거치치 않고 인쇄소에 직접 사람을 보내 관련기사를 삭제하고 광고를 넣을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잡지가 발행되고서야 이를 알게 된 이윤삼 편집국장은 사표를 제출했고 기자들은 편집권 수호를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파업을 시작했다. 이를 '시사저널 사태'라고 하며, 당시 시사저널 기자 총 25명 중에 23명이 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영진은 파업참여 기자들에게 무기정직 처분을 내리고, 인턴들을 임시 채용해서 대충 휘갈겨쓴 땜빵기사들로 발행을 강행했다.[* 언론고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넘쳐나는 기자 지망생들을 임시 채용하고 외부 필진들에게 돈을 주며 기사를 사서 잡지를 만들었던 것. 하지만 전문적인 훈련이 안 된 인턴들이 쓴 기사의 수준이란 게 뻔하지 않겠는가. 엉망인 기사 수준에 기존 독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시사저널은 그야말로 막장테크, 훗날 2013년 [[한국일보]] 사태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용역업체를 동원해 파업 중인 기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는 등[*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서 [[주진우(1973)|주진우]] 기자가 술회하기도 했다.] 양측의 대립은 1년 넘게 계속되었다. 파업기자들은 이 기간에도 각자 취재는 계속해서 '우리가 진짜 시사저널'이라면서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사를 선보였다. 이 사건은 '''[[재벌]]의 언론 길들이기'''라는 측면에서 [[PD수첩]]에서 다루는 등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2007년]] 경영진과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기자들은 시사저널을 모두 퇴사하여 새로운 잡지 창간을 준비하면서 이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결국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 23명 중에 22명, 그리고 직원 6명은 [[시사저널]]을 퇴사하고 2007년 9월 새로운 잡지인 시사in을 창간했다[* 참고로 파업에 참여했던 23명 중 회사로 복귀한 1명은 [[2011년]] '''시사저널 편집장'''이 되었다.]. 문제가 된 기사 표제에도 볼 수 있듯이, 기사는 삼성 [[이건희]]보다 [[2인자]]라 불리던 경영전략실장 [[이학수]]를 겨냥한 기사였다.[* 이건희 회장 밑에서 15년간 넘게 회장 비서실장,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삼성그룹 경영전략실장을 역임하면서 2인자로 군림하던 이학수와 그의 인맥들은 결국 2010년 [[이재용]] 후계구도 확립 과정에서 일제히 숙청되었다. 이 과정에서 같이 쓸려나간 이들이 이학수의 [[개성고등학교|부산상고]] 동문이었던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과 김응용이 데려온 [[선동렬]] 감독이었다.] 소대장보다 바로 윗 선임병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허구한날 언론에 노출되는 이건희보다 이학수에 대한 비판 기사가 삼성에는 더 아팠던 듯하다. 그야말로 집요하게 기사 게재를 막으려 했던 이유가 그런 면에서 해석될 수 있는데, 관련 내용은 이 기사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60627152914&Section=| 그날 〈시사저널〉에서는 무슨 일이…]] [[주진우(1973)|주진우]] 기자는 나중에 자신의 저서를 통해 진짜 이유를 밝혔다. 이학수 기사가 아니라 [[이건희]]의 개인비서인 박명경 상무에 대한 비판기사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해당 기사 제목의 '이건희 여자의 엘리베이터[* 박명경의 출세 경위를 암시한다] 승진'이었고, 삼성의 집요한 방해로 결국 이 기사도 나가지 못했다. 저서에서 주진우 기자는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책을 읽어보면 이건희와 박명경이 오랜 내연 관계로, [[홍라희]]도 둘의 관계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으며,[* 책에는 정확히 이렇게 나와있다. '이건희 회장 가족과 친분이 깊은 한 인사는 "이 회장의 [[이윤형|셋째 딸]]이 박명경 때문에 '우리 엄마가 피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라고 말했다.' (주기자, 86쪽)] 박명경이 삼성 조직 내에서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세력을 키운다는 내용.[* 실제 박명경의 친오빠는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근무했고, 친동생도 삼성의 협력회사 대표였다.] 박명경은 전문대학 출신인 인물이었는데, 1985년 삼성에 입사해 95년 삼성생명 과장, 98년 삼성전자 차장, 2002년 상무보, 2005년 상무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으며, 입사 후 줄곧 삼성그룹 비서실과 전략기획실 등에 몸담으며 이건희 회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한다. 박명경은 이른바 'MK'라는 이니셜로 삼성 내부의 문건에서 지칭되던 사람이었는데, 삼성에서 이니셜로 불리는 사람은 이건희 일가[* 이건희는 A, 홍라희는 A', 이재용은 JY 이런 식이었다][* [[https://youtu.be/6pgjJwvCgMs|#]]] 외에 박명경이 유일했으며, 당시 삼성 그룹의 몇몇 핵심 수뇌부만이 소유하고 있던 [[타워펠리스]]의 꼭대기 층 124평짜리 펜트하우스를 무려 2채나 혼자 소유했을 정도였고, 이건희 회장 가족 식사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사실 이건희의 여자관계를 다룬 기사가 문제였나, [[2인자]] 이학수를 비판한 기사가 문제였나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사태의 본질은 삼성그룹이 자신의 총수에게 불리한 기사를 [[인맥]]과 광고를 이용해서 방해하였고, 사실상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재벌이 돈과 인맥을 무기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이후 박명경 상무는 2010년 [[이학수]] 실장이 삼성물산 고문으로 좌천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이건희에게 직접 경질당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