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법 (문단 편집) === 찬양을 나타내는 경우 ===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 경우는 '''문'''이라 한다. (經緯天地曰'''文''') 의로움을 펴고 굳건하게 행동한 경우는 '''경'''이라 한다. (布義行剛曰'''景''') 위엄이 있고 굳세며 밝고 덕이 있는 것을 '''무'''라고 한다. (威强叡德曰'''武''') 근본이 부드럽고 백성을 사랑한 경우를 '''혜'''라고 한다. (柔質慈民曰'''惠''') 견문이 뛰어나고 두루 통한 경우를 '''소'''라고 한다. (聖聞周達曰'''昭''') 선하고 성스러우며 견문이 넓은 경우를 '''선'''이라 한다. (聖善聞周曰'''宣''') 의로움을 행하고 백성이 따른 경우를 '''원'''이라 한다. (行義悅民曰'''元''')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사를 확립한 것을 '''성'''이라 한다. (安民立政曰'''成''') 기강을 세워 다스린 경우를 '''평'''이라 한다. (布綱治紀曰'''平''') 군림하여 천하를 밝게 비춘 것을 '''명'''이라 한다. (照臨四方曰'''明''') 국토를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킨 것을 '''환'''이라 한다. (辟土服遠曰'''桓''') 총명하고 예지가 있는 경우를 '''헌'''이라 한다. (聰明叡智曰'''獻''') 온유하고 풍류를 좋아한 경우를 '''강'''이라 한다. (溫柔好樂曰'''康''')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킨 경우를 '''목'''이라 한다. (布德執義曰'''穆''') 행동이 안팎으로 돋보인 경우를 '''현'''이라 한다. (行見中外曰'''顯''') 선대의 위업을 능히 이어받은 경우를 '''광'''이라 한다. (能紹前業曰'''光''') 백성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대한 경우를 '''덕'''이라 한다. (綏柔士民曰'''德''') 도덕을 한결같이 숭상한 경우를 '''사'''라 한다. (道德純一曰'''思''') 굳센 덕으로 결단하고 극복함을 '''숙'''이라 한다. (剛德克就曰'''肅''') 적을 이겨 난을 평정함을 '''장'''이라 한다. (勝敵克亂曰'''莊''')|| '무(武)'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손견]]과 [[태종 무열왕|김춘추]]. 공교롭게도 같은 '''무열(武烈)'''이다. [[한무제]]는 그야말로 '[[진시황|진황]]한무'라고 칭송을 받았고, [[양무제]] 역시 남조 [[양(육조)|양나라]]의 대표적 명군이다. 반면 명나라의 [[정덕제]]의 경우엔 암군에 가까우나 그나마 무치라도 좀 남겨서 무종으로 그친 경우.[* 그러나 정덕제는 실제로는 암군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후대의 막장 군주인 가정제, 만력제와는 달리 부캐놀이를 하거나 미소년을 양자로 삼고 가출하는 괴짜 행각도 보이고 엽색 행각과 간신을 총애하는 나쁜 면도 보였지만 그래도 심하게 굴지는 않았고 반대로 주위의 신하들의 많은 조언을 '좀 놀지 말라'는 것 빼고는 다 들어주는 편이었고 자기에게 쓴소리 하거나 반대한다고 쫓아내거나 죽이지는 않았고 일도 꼬박꼬박 했다. 간신을 총애하긴 했지만 선을 넘은 유근을 [[능지형]]에 처해서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무종이라는 묘호가 붙을 만큼 무(武)에서의 관심도 많았다. 또한 특이하게도 유목민족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유목민의 옷을 입고 유목민의 텐트를 치고 살거나 유목민이 많이 믿던 티베트 불교에 관심을 보이고 몽골어나 산스크리트어에 능했으며 포르투갈, 서역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를 좋게 말하면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적어도 정덕제는 잘못도 하고 잘 한 것도 있어서 후대의 가정제, 만력제 시절의 명나라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이런 점을 보면 암군이라기엔 억울하고 명군이라기앤 애매한 평범한 군주.] '환(桓)'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제나라의 환공. [[손책]]의 시호인 장사환왕도 여기에서 왔다. '성(成)'을 받은 군주로는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 고려 전기의 치세를 남긴 [[성종(고려)|성종 왕치]], 조선 전기의 마지막 성군 [[성종(조선)|성종]]이 있다. '문(文)'은 최고로 좋은 시호이기는 한데, 후대로 갈수록 다소 형식적이고 무난하게 여겨지는 시호가 되었다. 그래도 문(文)이 가치하락은 겪지 않은것이 [[세종대왕]]의 묘호를 정할 때 신하들이 제안한 시호가 문종(文宗)이었기 때문. 그러나 [[문종(조선)|문종]]이 [[4군 6진]]의 개척 등을 예로 들어 세종이라 정했다. 뛰어난 정치로 비교적 약소국이었던 중국 [[주나라]]가 [[상나라]]를 압도할 국력을 키웠으며 그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周武王)의 아버지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도 있다. 후대에 의미가 조금 변질된 예로는 조조의 아들인 중국 삼국시대 [[위(삼국시대)|위(魏)]] 세조(世祖) [[조비#s-1|조비]]의 시호가 문제(文帝)이다. [[고려]]에서는 최전성기에 [[문종(고려)|문종 왕휘]]가 37년간 통치했으며, [[조선]]에서는 [[문종(조선)|문종 이향]]이 대표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