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법 (문단 편집) === 시호가 없는 경우 === 아예 시호나 묘호가 붙지 않는 경우도 있다. 폐위를 넘어서 '''[[군주]]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주우규|영왕]]이나 [[해릉양왕]], [[유빈(오대십국시대)|상음공]], [[유영(전한)|정안공]]처럼 왕(王)·공(公)·군(君) 등 제후의 시호가 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설명한 가칭의 시호나 묘호는 재위 기록이 아쉬울 뿐 군주였음은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의외로 역사상에 사례가 많다. 이를테면 [[황태자]]가 빨리 국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해 죽었다면, 그냥 황태자가 난을 일으켰다 식으로만 기록하고 끝난다. 설령 쿠데타 과정에서 [[유소(유송)|일시적으로 수도를 점거하고 즉위식을 올렸거나]], 1년 이상 장기전을 벌이면서 버티는 경우에도 결국 망했다면 같은 대접을 받는다.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 차기 군주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5년간 황제였으나 현대에서도 흑역사 취급하는 [[왕망]]이나, [[명청교체기]]의 틈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이자성]] 등이 있다. 고려에서는 [[충정왕]], [[우왕]], [[창왕]]에게 시호가 없었다. 충정왕은 원에서 내린 시호는 있으나 고려가 올린 시호는 없다. [[공양왕]]은 고려가 망하고 교살된 직후에는 바로 시호가 올라가지 않아 유배지의 이름을 따서 간성왕이라는 별칭으로만 불렸으나 시간이 좀 흐르고 조선이 안정되자 [[태종(조선)|태종]]이 공양왕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조선에서 우왕과 창왕은 고려의 임금임을 부정당하는 정도를 넘어 '왕씨' 가문의 일원임조차 부정당하였다. 조선에서는 [[단종(조선)|노산군]][* 사후 단종으로 추숭]·[[연산군]]·[[광해군]]의 사례가 있다. 특이한 경우로 [[정종(조선)|공정왕]]이 있는데, (당대에) 묘호가 붙지는 않았으나 재위 기록이 공정왕'''실록'''이고 능호도 후'''릉'''이며[* 능묘가 수도에서 10리~100리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에서 벗어난 개성 땅에 있지만, 이 사람은 [[제1차 왕자의 난|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던]] 한양을 싫어해서 개성으로 환도한 사람이기에 어떤 의미로는 수도 근교가 맞을지도 모른다.] 종묘에도 버젓이 올라가는 등 엄연히 왕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유형도 보이지 않게 급이 있다. 단순히 왕위에 오르기 전의 칭호에 시호를 붙이는 경우([[위소왕(금)|위소왕]])은 양반이고 이보다 낮은 작위를 내리는 경우([[송휘종|혼덕공]], [[송흠종|중혼후]])는 군주 취급도 안 해주는 것이고 아얘 폐서인해버리는 경우([[해릉양왕|해릉서인]])는 신분 자체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