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모노세키시 (문단 편집) == 역사 == 지리적 위치상 예전부터 해외 창구로서 번성했으며, [[헤이안 시대]]의 막을 내린 원평합전의 최후를 장식한 [[단노우라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싸움에서 어린 안토쿠 [[천황]]의 외조모인 타이라노 도키코가 안토쿠 천황과 [[삼종신기]]를 품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조선 통신사]] 방문시에도 항상 경로에 들어갔던 도시이다.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인겸]]이 [[일동장유가]]에서 언급한 첫날 묵은 적간관(赤間關, 아카마가세키)이 바로 이곳 시모노세키이다. 아카마가세키는 옛 이름. 일동장유가에서도 나오지만 이곳에 방문한 선비들은 시모노세키의 벼루를 선물로 많이 받았고, 이곳의 벼루의 품질을 높게 평가하였다. [[유득공]]은 친구 이정구가 가진 시모노세키산 벼루를 탐내서 강제로 빼앗았을 정도. [[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bid=b32&page=52&ptype=view&idx=2013|출처]]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대결이 벌어진 간류 섬이 여기 앞바다에 있다. [[메이지유신]] 때 큰 역할을 한 [[조슈 번]]의 활동근거지였기도 해서 에도 막부 말기, [[조슈 번]]이 서양 배척 운동을 벌이면서 여기에 해안포대를 설치해 [[시모노세키 전쟁|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차 조슈 정벌 이후 죽어가던 조슈를 부활시킨 시모노세키 거병도 관련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중고등학교 [[국사]] 내지는 [[근현대사]] 시간에 등장하는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1895년 체결된 조약. 청의 북양대신인 [[이홍장]]이 직접 참가했으며,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으로부터 배상금의 획득,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포기, 랴오둥 반도과 타이완 섬의 할양 등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되었으나, 일본의 급격한 세력 확대에 불안감을 갖게 된 [[러시아]]의 견제인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도로 토해내야 했다. 시모노세키에 청일전쟁 관련 기념관이 있다.] 때문에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도시이다. 1905년부터 [[부관연락선]]이 부산과 시모노세키 항로[* 전라선 개통으로 인해 여수-시모노세키간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2114038?sid=102|관려연락선]]도 취항했었다.]를 연결했으며, 이는 일본의 [[조선]] 및 [[만주]] 등 대륙 침략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노선은 1945년 광복 이후 단절되었다가 국교 정상화 5년 뒤인 1970년 [[부관훼리]]로 다시 재개되어 현재까지 운항되고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는 철도연락선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산요 본선]]과 [[경부선]]이 이 연락선을 통해 철도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시스템이 짜여 있었다.] 현재는 단순 페리라서 조금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