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멘트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초기 시멘트 제조소개.jpg]] || [[파일:William_Aspdin_Radford_cyclopedia_Volume_1.jpg]] || 시멘트가 [[인간]] 사회에 등장한 것은 약 5000여년 전이며, 시멘트를 사용한 공사로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초이자 최고의 것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유적이 제일 유명하다. 이때 사용한 시멘트는 주로 [[석회암|석회]] (주성분 탄산칼슘)와 [[석고]] (주성분 황산칼슘)였다. 이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에서는 석회에 모래를 혼합한 모르타르를 사용했으며, 나아가 여기에 화산재 성분을 첨가하면 수경성의 더 단단한 모르타르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시기에는 포졸란 석회를 소성하기 위하여 수직형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회와 화산재를 이용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고대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에서도 그러한 시멘트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증거가 나온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마케도니아]]에서 부터였으며, [[산토리니]]섬에서 채취된 화산재를 주로 사용했다. 이러한 방식의 "포졸라나 시멘트"와 이를 이용한 [[콘크리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광범위화게 사용되어 [[판테온]],[[콜로세움]] 그리고 [[수도교]]등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대형 건축물들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포졸란'이라는 단어 역시 당시 시멘트 원료로 쓸 화산재를 채취되던 주요 산지의 하나였던 [[나폴리]],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포추올리 지방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 물론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으므로 산토리니 등에서 나오는 화산재도 계속 시멘트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당시엔 석회에 화산재를 섞어 바닷물로 반죽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든 로마시대의 시멘트 방파제는 2000년이 지나도 유지될 정도로 견고하다.[* 화산재를 이루는 응회암이 골재와 모르타르 사이의 광물적 합생이 균열이 퍼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포틀랜드 시멘트에 쓰이는 골재는 표면이 불활성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균열이 커진다.] 이러한 포졸라나 시멘트 기술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상당부분 쇠퇴하게 된다. 건축술을 포함하여 로마시대의 기술과 문화 상당부분을 이어받은 [[동로마 제국]]에서조차,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처럼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직접 건축물의 '구조재'로 사용하는 건축술은 쇠퇴했고, (온전한 '포졸라나 시멘트'라기 보다는) 석회 모르타르 혼합물을 건축물의 외장재나 벽돌이나 석재를 붙이는 용도 등에 활용하는 정도였다. [* 여기에는 단지 지식과 기술의 보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5세기 이전 로마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환경의 차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특수한 산지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대량으로 수급하여 대량의 시멘트를 제조하고, 그것으로 전근대 사회로서는 상당히 단시간에 대규모 공공 건축물들을 지어 올리던 로마시대의 대규모 건설작업들은 당연히 지중해 일대를 석권하던 로마제국의 경제력과 행정력 운송망 등 말 그대로 '인프라'와 무관할 수 없다. 서로마를 상실하여 주요재료인 화산재 공급처를 잃어버렸으니 기술만 갖고있어봐야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과거 판테온이나 콜로세움을 세우던 시절과는 크게 다른 사회적, 정치적 환경 속에 있었고, 때문에 과거처럼 대규모 공공건축물들을 빠르게 지을 역량이 축소되었을 뿐 아니라, 애초 그래야할 (주요하게는 정치적) 필요성 자체가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시대의 서유럽에서도 로마시대의 시멘트 기술이 계속 보존되었다고 입증할만한 문헌자료는 1414년 로마시대의 시멘트 제조법을 담은 문서가 재발견 되기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시적인 문헌상의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서유럽에서도 일부 석공들이나 군사 기술자들은 여전히 같은 혹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수경성 모르타르를 수로나 요새, 항구와 조선소 등의 건설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애초 이런 방식의 시멘트의 핵심이 화산재라는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특수한 재료의 활용에 있었던만큼, 독일의 [[라인란트]] 지역 같은 곳에서는 역시 인근 지역에서 얻어지는 화산토('트래스Trass')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로마시대의 '포졸란 시멘트'와 비슷한 수경성 모르타르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산을 차지한 오스만 제국 역시 관련 기술을 그대로 접수해서 일부 건설사업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에서도 석회를 구워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송응성(1587-1648)이 남긴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는 "석회는 불로 태워 만드니 청색이 가장 좋고, 황백색이 그 다음이다. 질이 가장 좋은 것을 광회라 하고, 가장 나쁜 것은 요재회라 부른다"고 쓰여있다. 조선시대에도 석회 수요가 많아 궁궐이나 관아, 무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관 위에 대량의 석회를 부었다.(일명 회격(灰隔)이라고 불리는 석회3:모래1:황토1) 시간이 지나면 강철만큼 단단해 진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데 실패한 것도 이 때문. 더구나 굳는 과정에서 열이 발생하고 미생물과 잡균을 죽여버리면서 밀폐되기에 시신이 [[미라]]로 변하기도 한다.]을 만들 때 썼다. 충북 보은군에는 조선시대 때 석회를 만들던 가마가 무더기로 발굴되기도 했다. 아무튼 로마시대 이후 과거의 시멘트에 관한 기술이 얼마나 보존되고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는가의 문제와는 별도로[* 물론 포졸란 시멘트와 같은 기술이 본질적으로 비교적 제한된 산지에서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재료에 크게 의지하는 것이라는 한계 또한 분명하다.], 시멘트가 다시 건축과 건설의 주 재료로 부상하는 것은 1700년대 중엽에 들어 근대적인 방식의 대규모의 산업적인 시멘트 제조법이 연구되면서이다. 1756년 [[영국]]의 존 스미턴(John Smeaton)은 에디스톤(Eddystone) 등대 건설공사를 할 때 수중공사에 적합한 시멘트를 만들고자 석회, 화산재등을 검토하였으며, 이에 점토분이 있는 석회석을 소성하면 좋다는 '''수경성 석회(Hydraulic Lime)'''를 발명하였으나 석회에 점토분을 혼합하면 좋은 효과가 나는 이유는 밝히지 못했다. 다시 40년후인 1796년 영국의 제임스 파커(James Parker)에 의하여 점토질 석회석을 더 높은 온도로 소성하면 보다 좋은 시멘트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 시멘트와 [[물]]을 5:2의 비율로 혼합하면 1시간 이내에 응결 경화되는 급결성 시멘트를 발명하여 이를 후에 '''로만 시멘트(Roman Cement)'''라 부르게 되었다. 1811년 영국의 프로스트(Frost, j.)는 석회와 점토를 2:1 비율로 섞어 시멘트를 제조하여 '''Frost Cement'''라 하였으며, 1818년 [[프랑스]]의 루이스 조제프 비카트(Vicat, L. J.)는 석회석과 점토질 암석을 혼합, 소성하여 '''인공포졸란(천연시멘트)'''을 [[발명]]하였다. 1824년에는 영국의 연와공 조지프 애스프딘(Aspdin.J.)이 석회석과 점토를 혼합하고 융제(Flux)를 사용해서 융점을 낮추어 제조하는 시멘트를 만드는 방법을 발명하여 특허를 얻었다. 이 시멘트가 영국의 포틀랜드 섬에서 산출되는 석재와 그 색이 비슷하다 하여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시멘트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1851년 [[런던]] 공업박람회에서 그 품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지자 그 후 시멘트 제조방법이 전세계로 전해지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시멘트 공업은 영국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862년에는 [[독일]]에서 고로 슬래그를 혼합한 '''고로 슬래그 시멘트'''가 제조되어 혼합 시멘트 제조의 시초가 되었다. 1867년 [[프랑스]]에서 [[콘크리트]]가 처음 발명되었다. 1907년 경 [[프랑스]]와 [[미국]]에서 석회석과 보크사이트(Bauxite)를 원료로 하는 '''알루미나 시멘트'''가 제조되었으며, 1936년에는 [[시멘트]]의 수축성을 보상하는 '''팽창 시멘트'''가 발명되는 등 20세기에 들어와 시멘트의 종류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시멘트 제조연대는 [[영국]] 1825년, [[프랑스]] 1846년, [[독일]] 1855년, [[미국]] 1871년, [[일본]] 1873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