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내버스 (문단 편집) == 역사 == 버스가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운행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지역간을 연결하는 수단으로만 버스가 사용되었고, 도시 내부에서의 이동을 목적으로 한 운행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1911년 5월에 신설된 [[청주 버스 502|청주-조치원 간 버스]]가 노면전차가 없는 청주군에서 큰 마을에 중간정차하며 사실상의 시내버스 역할을 겸했고, '''11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청주시에서 가장 자주 다니면서, 가장 붐비는 시내버스 노선으로 남아있다.'''] 경성부, 부산부, 평양부 같은 대도시에서도 대중교통은 [[노면전차]][* [[경성전차]], [[부산전차]], [[평양전차]]]와 [[인력거]]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의 인구수는 315,000명에 불과했고 1,200대에 달하는 인력거가 도시교통을 충분히 감당했다.] 그러다가 1928년 4월 10일에 [[경성부]]에 상자형 시내버스 10대와 기사,차장 15명으로 영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운행 노선은 서울역~남대문~[[조선총독부]]~[[창덕궁]]~을지로~서울역의 순환 노선이었으며 승객수는 꽤나 많았다고 전해지나 배차간격이 30분~1시간이라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점점 배차간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차량 10대를 증차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버스요금은 7전으로, 당시 쌀 한가마니가 6원 가량이었던것을 생각하면 싼 요금이라고 여기기에는 어려운 금액이다.[* 참고로 전차삯은 4전이었는데 [[정주영|후에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되는 양반]]은 이것도 아까워서 걸어다녔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절기별로 운행시간이 달라 하절기에서는 6시~22시 운행했으나 동절기에는 8~19시에만 운행했다. 이후 노선이 더욱 확장되었으나 예상과 달리 승객이 별로 늘지 않자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며 결국 전차를 운행했던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이를 떠맡아 버스 54대로 경전버스[* 경성전기버스의 줄임말이다]를 설립한다. 하지만 전차와 버스를 한 운행사가 함께 운행했기 때문에, 이때 1장의 승차권만 가지고도 전차와 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한 일제강점기판 대중교통통합환승요금제(?)가 시행되었다. 1968년 교통부에서는 일시적으로 버스면허를 개방해 자유롭게 증차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문에 버스 대수가 2배로 폭증하면서 노선 경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업체들은 수익성을 장담할 수 없는 노선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긴데다 한명이라도 더 많이, 빨리 태우려는 난폭운전이 기승을 부리면서 업체들이 모든 노선을 돌아가며 운행하게 하는 [[공동 배차|공동배차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지금도 [[김천시 시내버스]], [[구미시 시내버스]] 등에서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들이 모든 노선을 외워야 하고, 공차회송 거리가 길어져 연료 낭비가 심해지는 단점이 있어 현재 대부분의 지자체에서는 다시 전담 노선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처럼 1980년대까지는 버스 산업이 나름 수익성도 있는 평가받았으나 1990년대 들어 지하철이 건설되고 서울시내 정체가 심해지면서 경쟁력을 잃었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992년 [[버스전용차로]]가 설치되었으며 서울시는 한술 더 떠 2004년 세금을 들여 시내버스의 안정적 운행을 보장하는 [[준공영제]]와 대중교통 환승할인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이런 대중교통 개편을 통해 2005년 5월 메트로폴리스 베를린총회에서 메트로폴리스상을 수상했고 7월에는 세계대중교통연맹으로부터 우수정책 인증도 받았으며 2006년 6월에는 세계대중교통연맹으로부터 혁신정책상을 수상하는 등 다양한 상을 받는 등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준공영제 업체들의 방만 경영 문제가 대두되며, 재평가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