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승자총통 (문단 편집) === 번외편: 승자총통의 복수 === 위처럼, 화승총에 당해본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개인화기로서 성능이 떨어진다며 [[조총]]을 순식간에 전병력에게 양산하면서 밀려난 개인화기이다. 하지만, 위력과 살상력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았고, 특히 근접전에서 산탄을 발사할때의 위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백병전을 차단할 수 있는 [[판옥선]]과 [[화차]]에서는 잘 사용되었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NISI20111128_0005518384_web.jpg]] [[파일:2295_3736_2435.jpg]]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개인화기로서는 쓸모없어진 승자총통 40문을 장착하여 만들어낸 [[화차]] 겸 [[전투마차]]의 모습이다. 이렇게, 백병전을 차단할 수 있는 방호벽을 만들고 여러개를 묶어서 [[오르간 건]]으로 사용하면 사실 사용자에 따라서는 잘 써먹었던 무기라는 후일담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일부의 사용자들의 재치가 뛰어나서 일어났던 기술 역전 현상이었을뿐, 처음부터 조총을 보급했다면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무조건 좋게 생각해선 안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술력과 신뢰성은 무조건 상대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조선이 조총을 순식간에 양산해버리고 모든 군대에 보급하는 엄청난 속도를 본다면, 기존의 승자총통하고 역할이 비슷해보이더라도 필요성에 맞는 각 시대의 최신 무기를 제때 보급하여 필요한 곳에 교차적으로 편제를 잘 짜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 선조가 조총 보급에 열정적이었다는 독자연구가 자주 이루어지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며, 임진왜란 초기까지의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아는 것과 무관하게 '''자체적인 조총 보급의 능력은 없었다.''' 조총은 당장 전투가 시급했던 일본에서 최고의 인력을 집중시켜 복제를 시도했음에도 대량생산까지 3년 가까이 걸렸고, 조선 역시 본격적인 조총 자체생산은 이순신의 정철총통 생산이 시작된 정유재란 직전 시점부터였다. 전쟁 이전의 조선은 조총을 복제할 능력도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조총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무역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수의 무능, 조정의 경직성 등으로 인해 조선이 조총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독자연구성 주장은 나무위키는 물론 2020년대 이후 역사적 탐구가 활성화된 다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주장이지만, 이는 사학계와 사학자를 막론하고 이미 2010년대 이전에 논박된 궤변에 가까운 주장이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조정의 경직성 따위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당장 백성들이 죽겠다고 부르짖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대일 전쟁 준비에 필사적이었고, 신립이나 이일 등 당대의 무장들 역시 결코 전쟁 위험성이나 무기의 도입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조선이 준비 없이 뻗대고 나간 것은 [[병자호란]]이지 임진왜란 때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거의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전쟁을 준비했으며, 그 결과 국력, 기술력, 군사들의 질과 양, 군비의 규모 등에서 당시 오스만 튀르크를 넘어서고 군사 규모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가던 초강대국 아즈치모모야마 히데요시 정권을 상대로 버티어 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