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팍스 (문단 편집) === 근대 === [[파일:스팍스 튀니지 16.jpg|width=550]] 메디나의 구시가지와 해안 퇴적지에 세워진 신시가지 17세기 중반 튀니지에는 자치적인 무라드 왕조가 세워졌다. 스팍스는 [[바르바리 해적]] 거점임과 함께 학문의 거점이 되었다. 아불 하산 엘 카라이과 알리 엔누리 등이 대표적인 학자로 각각 마드라사를 세웠고, 후자는 [[성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몰타를 해방하려는 지하드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역사가 마흐무드 메그디체는 스팍스의 역사를 다룬 '누즈하드 알 안타르 피 아즐라비 타와리크 와 알 아크바르'를 저술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일대 지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18세기 들어 튀니지를 지배하게 된 후사인 왕조는 기존 도시와 성밖 모두에 건설 사업을 벌였다. 쇠락했던 대사원은 1783년까지 하프스 왕조 시절 규모로 증축되었고, 1758년에는 새 미흐랍이 더해졌다. 높은 성벽 역시 재건되었고, 많은 인구를 감당하기 벅차진 나스리야 저수조의 보완을 위해 2개의 큰 저수조 건설 메디나라 불리게 된 성벽도시 주변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띠를 이루게 되었다. 도시 확장에 있어 특히 수세기 간의 간척으로 육지가 된 카스바 방면 해안이 개발되었다. 한편 18세기 중반 들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후사인 왕조 간의 무역 분쟁이 일었고, 1747년에는 베네치아 함대가 스팍스 인근에 나타나 라스 알 마크베즈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위기를 느낀 주민들은 신도시로 개발되던 해안 지대를 프랑크 (유럽인) 구역으로 설정, 유대인과 기독교도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프랑크 구역은 일대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동시에 베네치아발 공격으로부터 완충 지대 역할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1785-86년 베네치아는 2년간 4차례나 스팍스를 포격하였고, 동쪽 엔나르 성탑 옆에 큰 성채를 세워 도시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다만 결국 베네치아는 본국에 대한 프랑스의 침공으로 후퇴하였고, 성채는 철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