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칸데르베그 (문단 편집) ===== 1447 ~ 1448,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투, 양면 전쟁 ===== 그러나 레저 동맹은 얼마 안 있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다. 동맹의 물주를 맡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Dagnum 요새의 소유권을 두고 1447~1448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요새 확보를 매우 중시하여 군사, 외교적 공세와 더불어 스컨데르베우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이와 동시에 [[무라트 2세]]에게 스컨데르베우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로인한 [[양면전쟁]]에서 스컨데르베우는 베네치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으나, 오스만을 상대로는 스베티그라드[* 오늘날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의 Kodžadžik 마을.]가 메흐메트 2새에게 함락당해 동맹의 수도이자 스컨데르베우의 본거지인 크루여 요새가 오스만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위기를 불러온다. 스컨데르베우는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움직였으나 베네치아와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단 상황 탓에 오스만군의 포위를 풀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그러던 1448년, 베네치아의 요청을 받아 진군하던 오스만군이 오라니크에서 패배하자 베네치아는 결국 레저 동맹과 타협해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스컨데르베우(44세)는 오스만에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42세)가 [[코소보 전투|오스만 술탄국을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그에 합류하러 군을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녀디의 대 오스만 전쟁의 한 축을 담당할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 '주라지 브란코비치(72세)'가 헝가리군과의 연합은 커녕 침묵을 고수하면서 뒤로는 오스만에 헝가리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후녀디와 합류하려는 스컨데르베우를 세르비아군을 보내 막기까지 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 그는 결국 헝가리군과 합류하지 못했고, 헝가리군은 코소보에서 오스만군에 참패를 당하고(1448년), 스컨데르베우는 알바니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같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세르비아가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이렇다. 스컨데르베우가 거병하기 전인 1439년에 세르비아가 일시 멸망했다가 1444년에 오스만과 헝가리와의 강화 덕분에 재건된 일이 있었다. 당시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오스만과의 [[완충국]]으로 여겨서 세르비아 공작에게 넓은 영지를 주는 등 양자간에 봉신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헝가리의 신하이기 이전에 오스만의 신하국이였고, 무엇보다 세르비아의 공작인 주라지가 후녀디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일개 장군임에도 자신을 부리려 든다는 생각을 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스컨데르베우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신할 물주로 [[아라곤 왕국]]을 선택했다. 당시 아라곤 왕인 [[알폰소 5세]](나폴리 왕으로서는 알폰소 1세)는 서쪽으로는 지브롤터, 동쪽으로 보스포루스에 이르는 대제국을 창건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컨데르베우와 알바니아를 이를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서 지원을 결심했다. 이후에 스컨데르베우는 아라곤과의 관계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고, 10년 후 1458년에는 알폰소가 죽고 페르디난도 1세가 그 뒤를 이었을 때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