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젠차오 (문단 편집) === 복수 === 톈진으로 돌아온 스젠차오는 우연히 프랑스 조계지의 영화관에서 쑨촨팡이 타고 다니는 차량을 포착하였다. 스젠차오는 그 차량번호를 외워 쑨촨팡을 추적하였고 그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으나 복수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녀는 절망에 빠진 채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 그 절은 다름아닌 쑨촨팡이 평소 다니던 거사림(居士林)이란 절이었다. 그녀의 사정을 알리 없는 주지로부터 "그 유명한 쑨촨팡님도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했으니 아가씨도 열심히 불공을 드리라."는 말을 들은 스젠차오는 마침내 복수의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1935년 11월 13일 오후 3시, 쑨촨팡이 경전을 낭송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뒤에서 접근하다가 브라우닝 권총으로 세번 쏴서 무릎을 꿇고 있던 쑨촨팡을 암살했다. ||[[파일:시검교의전단.jpg]]|| || 거사 직후 스젠차오가 배포한 전단. || 암살 후, 그녀는 범죄 현장에 머무르며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적힌 전단을 목격자들에게 나눠줬다. >'''여러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첫째,''' 오늘 스젠차오(원래 이름은 곡란)는 쑨촨팡을 죽였는데, 이는 선친 시공빈의 복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상세한 상황은 제가 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읽어주십시오. >'''셋째,''' 큰 복수는 이미 하였으니 저는 법원에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넷째,''' 불당에 피를 뿌리고 여러분을 놀라시게 해서, 거사림과 여러 선생님들께 죄송합니다. 전단의 뒤에는 2개의 시를 써서 부친을 위한 복수를 한 심정을 적었다. >부친의 원수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모친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샌 것이 더욱 가슴아프다.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 걱정되지만 >시간은 더이상 미루지 못하게 하였다. >십년 전의 일은 감히 되돌아 볼 수 없고 >사물은 그대로지만 상황은 바뀌었네 >절에 자주 온것은 부처에게 절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검교는 죽기를 원할 뿐, 신선이 될 생각은 없다. 그녀의 이 같은 사연은 수많은 대중과 언론 매체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여론은 그녀를 동조했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 원한을 샀던 쑨촨팡이 살해된 것에 통쾌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젠차오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항소했고 이후 2년 간의 재판 끝에, 톈진고등법원은 그녀를 7년 유기형에 처했다.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펑위샹]], 국민정부 위원 [[리례쥔]],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 감찰원장 [[위유런]], 화북판사처 주임 [[장쥐]]를 비롯한 사회 명사들 역시 연명으로 스젠차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으며 전국부녀회 및 그녀의 고향인 안휘성의 각계 인사들도 백성을 위해 악인을 제거한 협녀 스젠차오를 선처해달라는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에 1936년 10월 20일에 국민정부는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명의로 스젠차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형기는 고작 1년 남짓 채운 상태였다. 스젠차오의 암살은 효를 숭상하는 유교 윤리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복수의 정치적 상징으로 인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