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여우싼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최후 === ||[[파일:말년의석우삼.jpg]]|| || 말년의 스여우싼 ||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스여우싼은 쑹저위안 휘하에서 181사단장이 되었고 펑위샹이 6전구 사령관을 맡게 되자 그의 휘하의 69군 군장이 되어 화북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지만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고 적전도주만 일삼았다. 1938년 말 10군단 총사령관이 된 스여우싼은 한푸쥐로 산동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녹종린]]의 기찰전구에 소속되어 유격전을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한동안 잘 지냈다. 하지만 1939년 4월 장제스가 산동성의 공산군을 제거해주면 종전 후에 화북의 통제권을 주겠다고 비공식적으로 타진하자 대대적으로 산동성에서 공산당을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차하얼성 주석에 임명되었다. 허나 1940년 1월 지난 인근의 평한철로에서 1만 7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팔로군을 공격하던 스여우싼은 2차례나 패했다. 2월 스여우싼은 주화이빙과 함께 타이항, 지난에서 팔로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지난과 웨이동에서 대패했다. 3월 5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팔로군은 츠현과 우안, 서현, 린현에서 국민혁명군 2개 사단을 섬멸했고 1940년 8월, 산동성 정부가 주재한 노촌이 함락되면서 국민정부는 산동성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스여우싼은 이번에는 일본에 붙을 타이밍이라 여겨 카이펑의 북지나방면군과 협상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스여우싼의 부하들은 1940년 11월 노서행영주임 [[손양성]]에게 스여우싼이 일본군에게 투항하려 함을 고변했다. 이를 알게 된 손양성은 신8군 군장 [[고수훈]]과 면담할 것을 스여우싼에게 지시했다. 12월 1일 아무것도 모르고 하남성 복양 유하둔에 있는 고수훈의 주둔지로 들어간 스여우싼은 기습적으로 체포되었다. 잠시 감금되었던 스여우싼은 곧 [[황하]]강변에 [[생매장]]되어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