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스여우싼 (문단 편집) ===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 1926년 9월, 펑위샹이 [[중국 국민당]] 가입을 선언, 제2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민혁명군]]을 이끌게 되었다. 펑위샹은 스여우싼에게 옛 일을 묻지 않겠다고 하였고 이에 스여우싼은 펑위샹에게 다시 합류하여 1방면군 산하 5군 군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2월 펑위샹의 지시에 따라 산동 방면에 배치되어 4월에 시작된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역시 제1방면군 산하 5군 군장 자격으로 참전했다. 1929년 [[편견회의]] 이후 24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펑위샹]]과 [[장제스]]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1929년 3월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가 [[리쭝런]]과 [[바이충시]]를 무력으로 토벌하고 [[리지선]]을 감금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펑위샹은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을 선포하였다. 당시 2집단군 5군장을 맡고 있던 스여우싼은 펑위샹의 지시에 따라 하남성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후 평한철로, 농해철로, 무승관 터널, 황하의 철교들을 폭파하며 중앙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소림사]]를 공격해 승려들을 죽이고 소림사를 불태워버렸다.] 허나 6월 1일 허창으로 철수한 스여우싼은 장제스가 심복인 [[전대균]]을 보내 자신에게 500만원의 군비와 안휘성 정부주석 자리를 제안하자 6월 2일 즉각 펑위샹의 10대 죄상을 통전하며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동관에서 정저우로 철수해버렸다. 장제스에 투항한 스여우싼은 13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허나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계계군벌]]의 잔당을 규합하여 [[2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스여우싼에게 광동 방위를 지시했다. 이에 스여우싼은 머나먼 남방에서 싸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동요하게 되었다. 이에 [[탕성즈]]가 그를 꾀어 반장파에 가입할 것을 권했고 스여우싼은 12월 1일, 난징을 향해 기습적으로 포격을 감행한 후 12월 2일 호당구국군 5로 총사령관에 취임, [[장당전쟁]]에 가담했으나 12월 20일 [[장쉐량]]과 [[옌시산]]이 장제스 옹호를 통전하며 참전하자 놀란 스여우싼은 옌시산에게 투항해버렸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스여우싼은 북평 국민정부 4방면군 총사령관 겸 2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어 [[쑨뎬잉]] 등을 거느리고 농해선 공격을 맡았으나 [[장쉐량]]의 [[봉천군벌]]이 관내로 진출하자 9월 19일, 장제스에게 다시 항복 의사를 타진하였다. [[한푸쥐]]의 주선으로 투항을 허락받은 한푸쥐는 13로군 총지휘 직책을 회복하고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장쉐량에게 투항했다. 11월 21일, 소속 부대를 3만 2천명으로 감축했다. 1931년 봄, 봉천에서 장쉐량을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산하 병력 6개 사단, 3만 2천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화북에 주둔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