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리랑카 (문단 편집) === [[불교]] === >최초기부터 불교와 정치는 그 나라의 역사와 얽혀 있었고, 사원과 국가 또는 승가와 국왕 사이에는 밀접한 호혜적 관계가 있었다. 왕들은 승려들에 의해 축성(祝聖)을 받았고, 승려들은 조언자로서 봉사하면서 불교의 가르침들을 통치자를 위하여 풀이해주었다. 승려들은 오늘날까지 공적인 사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왔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역사상 몇 차례의 쇠퇴기를 겪었다. 종종 이러한 쇠퇴기는 인도 [[타밀족]]에 의한 것과 같은 침략이나 민중 봉기 이후에 나타났다. 몇몇 경우에는 승려들에 대한 수계(授戒)의 전통이 사라진 예도 있었는데, 그것을 재개하기 위해 1065년에는 [[미얀마]]에서, 그리고 이후 1753년에는 [[태국]]에서 승려들을 불러와야 했다. >---- >-데미언 키온(Damien Keown)[*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 불교윤리학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 『불교』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는 [[아소카 대왕]]이 [[제3차 결집]] 직후 전법사로 자녀인 마힌다와 상가밋따[* 아누라다푸라에는 상가밋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보리수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를 전법사로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스리랑카는 [[상좌부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누리며, 주류 민족인 싱할라인에게 [[민족종교]]의 역할도 맡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스리랑카로부터 전법사가 파견되어 상좌부 불교 우세지역이 되었다. 이후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과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 포르투갈(가톨릭), 네덜란드와 영국(개신교).]의 침략 때문에 스리랑카 불교는 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독립 전까지 [[크리스천]]들의 불교 탄압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포르투갈]]에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중 하나인 불치를 탐냈고,[* 당시 스리랑카 국왕이 가짜 불치를 포르투갈군에게 주며 진짜 불치를 숨겼고, 진짜 불치는 독립 후 캔디의 달라다말리가와 사원에 봉안되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됐을 때 정점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고의적인 허위/날조/비하 발언에 이어 승려들의 [[탁발]]을 금지했다. 남방불교 지역인 스리랑카에서는 승려가 끼니를 해결하려면 하루에 한 번 탁발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게 막았는데 불교를 믿을 거면 굶어 죽으라는 얘기였다. 또한 사찰 소유 부동산을 무단 압류 후 교회에 헌납하기, [[불자#s-1|불자]]의 [[공무원]] 채용 금지, 승려 살해 등을 저질렀으며 신생아를 강제 [[세례]]시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정식 [[출생신고]]와 [[결혼]]이 불가능하도록 했다. 이처럼 온갖 박해를 가했고, 1850년대까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나오던 불교계의 방침을 완전히 돌려놓게 된다. 결국 1873년에 파아나두라(Panadura)에서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가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David De Silva)와 시리만나(Sirimanna) 전도사를 상대로 불교와 기독교 중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를 가리는 '''파아나두라 대논쟁'''이라는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이 논쟁에서 양측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어서 각자 승리를 주장했다. 다만 마침 스리랑카에 체재 중이던 미국인 학자 피블스(J. M. Peebles) 박사의 언급으로는, 불교 측이 인성과 태도에서 더 훌륭했으며 일반 민중을 더 끌어들였다고 한다.[* 「먼저 당시의 구미 지식인들의 평가 중 대표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피블스 박사의 저서 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와 기독교) 양측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를 가지고 있어, 언제나 양측이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했다. 공평하고 객관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들은 바로는, 불교 측 승려는 인성과 태도가 훌륭한 대론자였으며, 일반 민중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하고 군중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00|불교평론]]] 스리랑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한 불교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토론이 끝나자 불교 신자들은 물론 기독교, 특히 가톨릭은 당연하고 개신교 신자들까지 구나난다 스님을 향해 "사두! 사두! 사두!([[산스크리트]]로 "좋다", "휼륭하다"는 뜻. 상좌부 불교에선 불자들이 승려의 법문이 끝났을때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이를 3번 합송한다)"를 연신 외치며 환호했다.[* 다만 종교간 토론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상대 종교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기에 수준 높은 종교 토론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일단 실바는 팔리어를 알고는 있었지만 통달하지는 못했고, 불경의 인용 자체를 잘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낮은 불교 이해 때문에, 논쟁 후반에는 실바 목사가 아닌 현지인{{{-2 (추정)}}} 시리만나 전도사가 바톤을 이어야 했다. 게다가 이러한 애매한 팔리어 지식에도 불구하고 실바는 {{{-2 (싱할라어를 사용한 구나난다와 달리)}}} 수천명의 청중에게 산스크리트와 팔리어로 인용하며 연설하는 황당한 전략을 구사했다. 청중 중 소수만이 실바의 연설을 이해할 수 있었다.[br]한편 불교측의 대론자인 구나난다는 '영혼불멸'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희랍철학적 의미의 이원론적 영혼론{{{-2 (몸은 영혼의 감옥)}}}으로 잘못 전제했으며, 그래서 “만약 기독교가 설하는 것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살인을 범했다 해도 별문제가 없다는 데에 귀결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해도 영혼은 불멸하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불멸의 생명 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거꾸로 윤리 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2 (석오진 저, 《파아나두라 대논쟁》, 운주사, 2019, pp.67-69)}}}이라는 잘못된 논증을 하였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는 {{{-2 (Peebles 박사가 인용하듯이)}}} '인성'과 '태도'와 '군중을 끌어들임' 정도는 평가할 수 있겠으나, 학술적 의미에서 수준 높은 토론이라 하긴 어렵다.] 독립 이후 스리랑카는 [[새해 첫날]]이 평일인 대신 [[보름달]]이 뜨는 모든 날이 공휴일(Poya day)이다. 한글 발음으로는 포야 데이. 이 날에 한하여 술 판매가 금지된다. 즉 보름마다 꼬박꼬박 공휴일이 있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에서는 포살(布薩)이라는 의식을 매 보름날마다 행하는데, 포살일이 되면 승려는 계율을 어긴 게 있는지 확인하고 참회하며, 평신도들은 이날 하루, 혹은 며칠만이라도 5계나 8계를 지키려고 한다. 이런 불교전통을 공휴일로 보장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