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겐인 (문단 편집) == 생애 == [[1573년]] 오미국 오다니성[* 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있었던 산성터]에서 태어났다. 출생연월일이 [[1573년]]이라는 것은 덴쇼 12년에 12살이었다는 기록에서 역산하여 추정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기일 때로 보이는 [[1573년]] [[9월 1일]][*양력 [[9월 26일]]] [[아자이 나가마사]]는 패망하고, 나가마사의 배려로 오이치와 고우를 포함한 3자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고, 고우는 이미 오다니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노부나가의 배려로 이세 우에노성[* 현재의 미에현 이가시 우에노 마루노우치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으로 1611년부터 도도씨(藤堂氏)가 거주하는 성으로 변모하며 현재의 규모로 확장하게 된다.]으로 가서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 1543 ~ 1614)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나게 된다. 그러다가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의 변|죽음을 당하자]] 이후 노부나가의 후계를 놓고 한바탕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키요스 회의]]에서 어머니 오이치는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재혼을 선언하고, 3자매는 에치젠의 키타노쇼성[*北ノ庄城 후쿠이현 후쿠이시에 있는 윤곽식 평성으로 에도시대 초기에 어려가지 이유로 후쿠이성(福井城)으로 고쳐지며 에치젠 마츠다이라씨의 거성이었다가 지진, 메이지 시대의 해체 등으로 공원, 공공시설이 안으로 들어왔다.]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나 [[1583년]], 시바타 가츠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키타노쇼성도 함락되자 오이치는 자결하고 만다. 이후 3자매는 히데요시에 의해 [[교토]]로 보내졌거나 혹은 [[아즈치 성]]으로 보내졌다는 설도 있다. 이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하려는 목적에서 노부카츠의 가신인 [[오와리]]의 오노 성주 사지 카즈나리(佐治一成, 1569 ~ 1634)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좀 불확실하다. 히데요시가 정략결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 오다 노부카츠가 사지 가문과의 화해를 위해서 고우를 시집보냈다는 설도 있고, 약혼만 했을 뿐 실제 결혼까지는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즈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왔다는 이유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히데요시는 자신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카츠|하시바 히데카츠]]에게 고우를 시집보내게 되는데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시바 히데카츠는 조선에 건너갔다가 [[거제도]]에서 병사하는 바람에 고우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렸다. 히데카츠와의 사이에는 딸 사다코를 낳았다고 하는데, 사다코는 공가(公家)쿠죠 유키이에(九条幸家, 1586 ~ 1665)에게 시집갔다고 하며, 오사카 성 여름 공방전 이후에는 스겐인의 부탁을 받고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고 한다. [[1595년]], 고우는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게 된다. 본래 히데타다의 결혼 상대는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오다 노부카츠]]의 딸인 [[오히메]]였지만 [[오히메]]가 죽는 바람에 이 혼사는 물건너 가게 되었고 대신 고우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히데타다와의 결혼은 세 번째 결혼으로, 이에 반해 히데타다는 2번째 결혼이었기 때문에 신혼 때는 사이가 약간 서먹서먹했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는 히데요시가 중매 해줬다는 썰이 있다.] [[1597년]]에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를 낳았고,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츠]]와 [[도쿠가와 타다나가]]를 낳아 2남 5녀를 두었다. 후에 [[고미즈노오 덴노]]의 중궁이 되어 [[메이쇼 덴노]]를 낳은 [[도쿠가와 마사코|마사코]]도 그녀의 딸. 파란만장했던 전반의 삶과는 달리 후반의 삶은 쇼군의 생모로서 안정된 삶을 살게된다. 실제로도 [[도쿠가와 이에미츠|차기 쇼군]]을 낳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라고. 다만 그녀는 장남 이에미츠를 싫어하고 차남 타다나가를 편애해 타다나가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설로는 이에미츠가 좀더 익숙하고 편한 상대인 유모 [[카스가노츠보네|오후쿠]]를 친모인 자신보다 더 잘따랐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로 사료에서 고우가 차남 타다나가를 일방적으로 아끼고 장남 이에미츠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등의 구체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타다나가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려고 한 일차사료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방증 사료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https://ja.wikipedia.org/wiki/%E5%B4%87%E6%BA%90%E9%99%A2|#]] 어머니 [[오이치]]와 마찬가지로 대가 센 여자였다고 한다(게다가 남편 히데타다보다 6살 연상). 히데타다가 [[공처가]]라서 남편과의 사이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이 영향으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와 별개로 아들은 얻었기 때문에 후사를 얻는 데에는 성공했다. 명문가 정실이 아닌 낮은 신분의 첩에게서 얻은 것을 보면 어머니가 보여준 명문가 여성 특유의 높은 자존심과 강한 자기주장에 질렸던 모양이다. 이는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유사한 점이다.] [[1626년]]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사망해 화장되어 묻혔는데, [[2차대전]] 이후인 1958년 스즈키 히사시(鈴木尚, 1912 ~ 2004) 등이 조조사의 [[도쿠가와]]가 묘소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묘도 발굴되었다. 화장된 뼈가 발견되었는데, 뼈의 골격등으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몸집이 작고 가녀린 미녀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고. [[https://ja.wikipedia.org/wiki/%E9%88%B4%E6%9C%A8%E5%B0%9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