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슝스후이 (문단 편집) === [[국공내전]]과 말년 === [[중일전쟁]] 말기에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지명으로 협진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종전 후인 1945년 8월 31일, 동북행영 주임 겸 동북 정치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슝스후이는 소련과 조약을 체결하면 동북 지역의 접수가 훨씬 원활할 것이며 화북, 화중, 화남보다도 빨리 수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으나 10월 12일, 주소 중국대사 [[푸빙창]]을 통해 행해진 소련과의 비행장, 항구 사용 교섭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국민정부의 세력을 만주에서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앙 설계국 명의로 동북복흥위원회를 수립하여 [[만주국]] 시기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한반도 귀환정책을 펼쳤다. 1946년 12월, 국민정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1월부터 벌어진 만주진공작전에서 중국군을 지휘하였고 만주를 시찰한 [[장징궈]]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해 8월 동북행영주임에서 면직되어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혁신계로부터 부패한 인물이라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48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에서 발표한 전범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1949년 1월, 장제스가 총통에서 사직하자 절강성 계구에 기거하던 그를 문안하며 충성을 확인했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영국령 홍콩]]을 거쳐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도주했다. 한동안 [[웨이다오밍]] 등과 함께 해외에서 대만의 정치적 상황을 관망하였으며 태국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였다. 1954년에 귀국하였고 1974년 타이중 시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