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슝스후이 (문단 편집) === [[초공작전]]과 [[중일전쟁]] === 1930년 5월, 강절환 초비총지휘 겸 육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초공작전]]에 투입되었다. 1931년 6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겸 난창 행영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비행기 사고를 당하여 전선에서 물러나고 12월 15일, [[루디핑]]에 이어 강서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허잉친]]으로부터 강서성의 1개 사단을 차출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미 공산당 토벌에도 여력이 없을 뿐더러 고작 1개 사단을 가지고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리고 만약 강서성의 방위선이 돌파될 경유 그 파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1932년 11월, 난창 행영 판공청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34년 10월, 강서성 보안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 시기 난창행영 비서장 양영태와 함께 장제스의 친위파벌인 정학계를 구성하였다. 중국 공산당 서기를 지낸 [[샹중파]]를 체포하여 처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이 시행되자 장제스로부터 난창 행영 당정군조사설계위원회 정치조 조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 [[복건사변]]의 발생으로 복건의 난을 진압하고 온 장제스로부터 성과를 요구받자 [[신생활운동]]의 시행을 제안하였다. 1934년 2월 15일, 장제스는 자신의 자택으로 슝스후이 등을 초청하여 예의염치를 앞세운 신생활 운동의 시행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황포계나 CC계와는 달리 슝스후이는 신생활 운동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3,4개월이 지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난창 신생활운동 촉진회 간사회 주임으로 선출되었고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며 그를 최고의 영수로 표현,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신생활운동에 관한 원칙은 모두 세 가지로 이 원칙을 따라가면 신생활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은 무엇인가? 시간상으로 말하면 첫째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둘째는 손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며, 셋째는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첫째, 둘째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시간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지금 이후에는 모두 행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 시간상으로 이와 같다면 공간상으로는 어떠한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첫째는 우리의 영수가 방법을 결정하며 둘째 각 간사가 주도하고 계획하며 셋째는 모두가 행하는 것이다. 현재 영수가 결정한 방법, 간사의 계획과 계책 역시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이하로는 각자가 행하는데 힘써야 한다." 1935년 11월에 개최된 중국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6년, 강서성의 CC계를 제거하기 위해 [[천리푸]]와 권력다툼을 벌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장제스]]의 지시를 받고 [[제2차 상하이 사변]]의 전황을 시찰하기 위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슝스후이는 일본군을 이길 수 없으며 군대를 증파한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보고했으나 같이 시찰을 했던 신임 군정부장 [[천청]]은 슝스후이의 의견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상하이가 뚫리면 중국의 방위선은 겉잡을 수 없이 붕괴될 것이라면서 증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제스는 천청의 주장을 수용하여 대규모 군대를 상하이로 파병했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후 [[후스]], [[천부레이]], [[타오시성]], [[왕징웨이]], [[천궁보]] 등과 함께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전이 오히려 중국을 죽이는 길이라 주장,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했으나 왕징웨이가 [[왕징웨이 공작]]에 넘어가 일본에 붙은 것과 달리 매국의 길은 거부하였으며 강서성에서 일본에 대한 항전을 수행하였다. 1938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1941년, 강서성의 병사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 한여름에도 겨울군복을 입어야 할 정도라고 열악한 현실에 대해 보고했으며 1942년 2월, 강서성 정부주석직에서, 5월에 강서성 보안사령관에서 면직되어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주미군사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 개정을 요구하였다. 1943년 7월, 삼민주의 청년단이 조직되자 제1기 중앙단부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중앙 설계국 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 대만조사위원회가 설립되자 자파의 [[천이(1883)]]를 주임위원으로 추천하였다. 1944년 중앙은행 감사를 지냈다. 1945년, 중앙집행위원에 유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