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쉬충즈 (문단 편집) === [[탕산 사건]]과 [[1차 양광사변]] === 1931년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구잉펀과 등택여 등은 장제스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 반장파에 가담했다. 이들은 전 국무총리 [[탕사오이]]를 반장파에 끌어들이는 한편 [[쑨커]], 쉬충즈, [[천유런]], [[왕징웨이]]의 광동행을 추진했다. 이에 설득된 쉬충즈는 쑨커, 천유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상하이를 떠나 5월 24일 새벽 [[영국령 홍콩]]에 도착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집에 모여 양광의 정세를 논하는 한편 반장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토의하였고 이로 인하여 개조파와 서산회의파가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5월 27일 왕징웨이, 쑨커, 쩌우루가 주축이 되어 [[탕사오이]], [[왕충후이]], [[린썬]], [[리례쥔]], 등택여, 소불성, 등청양, 구잉펀, [[천지탕]], 진책, 마초준, 이문범, 유기문, 임운해, [[리쭝런]], 쩌우루, [[탕성즈]], 진요원 등 22명의 반장파가 모여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 비상회의를 광저우에서 소집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쉬충즈는 국민정부위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광저우 국민정부가 난징에 대한 북벌계획을 수립하면서 쉬충즈는 복건 공격을 맡게 되었지만 장제스가 [[제3차 초공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강서성으로 가면서 당장 교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광저우 국민정부는 북벌을 개시했으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장제스가 통합을 조건으로 하야하자 광저우 국민정부는 1932년 1월 난징 국민정부와 재통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