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쉬충즈 (문단 편집) === [[국민혁명]]과 [[반장전쟁]] === 1927년 장제스가 우한의 연석회의에 의해 권력이 박탈당했을 때 장제스를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명령에 복종하고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신용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당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만 이 나라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국민혁명]] 이후 [[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쳐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1927년 8월,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영한합작]]을 이루었는데 이때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당중앙도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쉬충즈는 [[왕징웨이]]와 접촉하여 개조파와 서산회의파의 화해를 도모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후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가 다시 권좌에 복귀하여 서산회의파들은 난징 참안의 배후로 지목되어 입지가 좁아졌고 그 때문에 대부분 출국의 길을 택하였는데 쉬충즈도 일본 파견을 명목으로 제거되었다. 쉬충즈는 쩌우루 등과 함께 일본과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출국하기 전, 쉬충즈는 쩌우루 등과 연명으로 2기 중앙집행위원회가 법률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서산파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쉬충즈는 서산회의파의 거두인 쩌우루와 관계가 매우 밀접해졌다. 이후 쉬충즈는 7월 12일 쩌우루와 함께 독일에 초착했다가 7월 27일 쩌우루 일행이 스웨덴으로 이동할 때 혼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1928년 8월 28일 귀국하는 후한민을 영접하기도 했다. 1929년 [[편견회의]]를 계기로 군벌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호남 사건]]의 발생으로 [[리쭝런]], [[바이충시]] 등 [[계계군벌]]이 [[1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쉬충즈는 [[쥐정]], [[셰츠]] 등과 1929년 5월 광저우에 집결하여 계계군벌과 같이 반장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5월 18일 쉬충즈는 장제스의 국민정부 주석 취임 반대, 국민회의 소집, 3전대회 정당성 불인정, 쉬충즈의 도장총사령관 추대 등에 합의했다. 정치력이 부족했던 광서파는 양광을 통일하기 위해 군사 문제는 쉬충즈에게, 정치문제는 쥐정과 셰츠에게 위임하기로 하였으나 계계군벌은 곧 중앙군과 월계군벌에게 토벌당했다. 계계군벌이 토벌당하고 장제스가 서산회의파의 일원들에게 총살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산회의파들은 평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펑위샹]]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군벌이 장제스에 대항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쉬충즈는 펑위샹을 만나 반장을 위한 합작을 원한다는 의사를 타진했고 펑위샹은 이에 호감을 보이며 대표를 톈진에 보내 쩌우루를 자신의 총사령부에 초대했다. 이리하여 서산파와 서북군벌의 합작이 이루어지고 [[1차 장풍전쟁]]이 일어났으나 서북군벌 역시 장제스에게 토벌당하면서 실패했다. 1929년 12월 12일, [[중국 국민당]]은 쩌우루, 셰츠, 쥐정 등과 함께 쉬충즈의 당적을 박탈했다. 하지만 쉬충즈는 12월 13일 [[쥐정]], [[셰츠]], 쩌우루와 함께 장제스의 하야와 출국을 요구하는 통전을 발표했는데 [[리례쥔]]을 비롯한 국민당 원로들이 다수 호응했다. 이에 국무회의는 쉬충즈 등에 대한 공식 지명수배를 결정했다. 1930년 [[왕징웨이]]의 개조파하고도 힘을 합쳐 1930년 [[옌시산]]이 주도한 [[중원대전]]에 참여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한동안 상하이에 머물면서 반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