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쉬창시 (문단 편집) == 역사 == 원래는 [[주나라]] 시대 [[허나라]](許) 지역이라서 허라고 불렸다. [[낙양]]의 동남쪽으로 약 80km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춘추전국시대-한나라 시기에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나마 꼽자면 [[항우]]의 양성(襄城) 학살이 이웃동네이자 시외의 현인 샹청현에서 벌어졌었다. 샹청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바로 양성이다. 이 도시가 바로 역사의 주무대가 된 것은 바로 [[조조]] 때문이었다. 서기 196년 군벌인 [[조조]]가 장안에서 이각-곽사의 수중에 있다가 낙양으로 탈출한 [[헌제]]를 보호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조는 이곳을 낙양을 대신할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다. 당시 낙양은 [[동탁]]에 의해 불에 타버려 폐허가 되어 있었고, 장안은 이각과 곽사의 난을 겪은 데다 안보에 취약하였다. 또한, 허는 조조 자신의 근거지([[연주(중국)|연주]])와 가깝고 주변 물자가 풍부하다는 이점도 있었기에 조조는 헌제를 이곳으로 모셔와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허현이 속한 예주자사가 죽은 상황이라 조조는 헌제를 모셔오면서 예주를 먹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듣보잡]]이었던 도시가 명목만 남은 [[후한]]의 수도가 되어 유명해졌으며, 이때 도(都)가 붙어 '허도'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연호를 [[건안]](建安)으로 바꾸니 이것이 24년[* 단 [[유비]]는 26년, [[손권]]은 27년간 사용했다.]간 지속된 건안 연간의 시작이다. 조조가 죽자 [[조비]]가 왕위를 잇고, 221년 "魏基昌于許"(위기창우허, 위나라의 기초는 '''허'''에서 번'''창'''할 것이다.)라는 말을 지으며 허창으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나 각종 삼국지 매체에서 조조 생전에 허창 거리면 [[창작물의 반영 오류|재현 오류]]가 된다.(...) 역사서 [[삼국지]]에서는 허창으로 개칭되기 전에 "허", "허도"라는 말도 자주 쓰인다. 그런데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90년부터 떡하니 허창이라고 되어있다.[* 비슷한 케이스인 건업의 경우도 212년에 오나라가 도읍을 옮기면서 새로 붙인 명칭인데, 이에 맞춰 그 이전 시나리오까지는 과거 지명인 말릉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허창의 경우는 최근까지도 딱히 신경쓰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제후 시절 [[모개]]가 건의하고 건안 1년 [[한호]]가 건의한 [[둔전(삼국지)|둔전제]]의 가장 큰 효과를 본 동네로, 196년 가을 시작해 197년 첫 해에 무려 '''양곡 백만 석'''의 식량이 모였다고 한다. 이후 둔전제는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조조가 쇠락하지 않고 주변 군웅들을 제압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조비의 시대엔 이미 둔전제가 한계를 보이며 서서히 쇠락하는 상황이었고, 사실 천도는 이런 경제적 배경을 반영한 측면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안 연간에는 장안, 낙양, [[업성|업]], [[보저우|초]](譙, 조조의 고향으로 흔히 말하는 초현)와 더불어 [[리즈시절]]에는 5대 도시라고 불렸으나, 결국 조비는 220년대 낙양을 복원하고 황궁을 지었으며, 이전하며 허창의 황궁은 헐어버렸다. 그리고 인구도 모두 이전하며 허창은 다시는 수도가 되지 못하고 [[듣보잡]]이 된다. 결국 오늘날까지 길이 남은 "허창"이란 이름을 지어준 조비는 약 주고 큰 병 준 셈. [[고평릉 사변]]에서 [[환범]]이 [[조상]]에게 허창에서 [[조방]]을 데리고 농성하라고 진언했으나 조상이 듣지 않았다. 또 한번은 [[태위]] [[왕릉(삼국지)|왕릉]]과 [[연주(중국)|연주]]자사 [[영호우]]가 모의해 황족 [[조표#s-2|조표]]를 황제로 맞아들이고 수도를 다시 연주의 허창으로 옮기려고 했다. 영호우는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해 조표와 왕래했지만 흐지부지 되었고, 후에 모의가 발각되자 [[사마의]]는 왕릉을 토벌하러 친히 수춘으로 출정, 왕릉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다시 음모가 드러나서 왕릉은 자결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허창은 완벽하게 몰락하고 말았으며, 이후의 역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북쪽의 [[정저우]]를 통과해 [[우한]]에 이르는 길목에 있던 덕분에 철도가 놓이게 되었고, 이때부터 1700여 년간의 쇠락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맨 위의 '허난성의 행정구역'을 펼쳐서 허창시의 하위 행정구역을 자세히 보면 시내 지역은 웨이두(魏都), 즉 '위나라 수도'구와 젠안(建安) 즉 '건안'구로 양분되어 있고(...) 위저우시 등 나머지는 모두 시내 밖의 예하 현급 행정구역들이다. 즉 인근의 굵직한 정저우, 뤄양, 카이펑과 차별화하여 지역의 정체성으로서 내세울 만한 것이 한말위초의 그 얼마 안되는 역사뿐인 것이다.(...) 2천 년이 가깝게 흐른 현재에는 조금씩 발전하는 추세라고 하며, 인근에 헌제의 무덤인 [[선릉]]과 헌제가 [[선양]]했던 수선대를 포함해서 위나라 유적이 어느정도 남아 있어서 삼국지 팬들이 좀 오는 편이기는 하나, 그래도 낙양이나 서안(장안), 성도, 남경(건업)에 비하면 유명세로 보나 유적으로 보나 부족한 감이 크다. 게다가 쉬창시에 있는 위나라 관련 유적들은 거의 다 현대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일부에선 이렇게 건립된 위나라 유적이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나, 사실 아래 나오는 청두의 촉나라 여러 유적들도 대부분 다 후대[* 오래되어봐야 명청대이고, 그것도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80년대에 재건한 것들이 많다.]에 다시 재건된 것으므로 마찬가지로 역사적 가치는 별로 없다. 목조건물이 목재의 재질 한계상 천 년 넘는 세월을 버티기는 힘든 데다가, 중국 대륙에는 외침에 의한 전란이 많았기 때문에 원래 유적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은 중국 삼국시대보다 400년 정도 뒤인 [[통일신라시대]]의 [[봉정사]] 극락전(672) 건물이며, 일본은 이보다 60여 년 앞선 법륭사(607) 건물이다. 오랜 시간 외침이 많았던 중국은 의외로 한일보다도 훨씬 그 당시 만들어진 목조건물이 희귀하며 중국 최고 목조건축물은 오대산 남선사 건물로 782년에 건립되었다.] [[몽골-금 전쟁]]의 결정적인 승패를 갈랐던 [[삼봉산 전투]]가 이 인근, 정확히 말하면 시외의 현급시인 위저우시 교외에서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