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쉬스창 (문단 편집) === 대총통 하야와 말년 ===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군벌은 더 이상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쉬스창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이에 우페이푸 등 직계는 법통중광이라는 구호를 들고 와 장쉰이 해산한 구국회를 소집하고 북양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자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돤치루이가 만든 안복국회의 정통성이 부인되어 안복국회에서 선출된 쉬스창도 당연히 물러나야 하고 임시 약법 하에서 마지막으로 선출된 [[리위안훙]]이 대총통이 되는 것이었다. 우페이푸의 이러한 구국회 복구 운동에 광저우의 민우사, 상하이의 익우사 국회의원들이 호응하였고 구 국회의장 [[우징롄]], 왕가양 등도 1922년 5월 10일 우페이푸가 개최한 바오딩 회의에 참여하여 법통중광을 지지했다. 1922년 5월 19일 우페이푸는 쑨촨팡을 시켜 구국회 복구를 선동하고 마땅히 리위안훙을 복직시켜야 한다는 전문을 보내 쉬스창과 쑨원을 공격했다. 여기에 정학계, 헌정연구회, 량치차오 등도 동의했고 5월 27일 우페이푸는 자신이 이미 10여개 성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좋은 말로 할때 하야하라는 위협전문을 보냈다. 5월 28일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톈진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리위안훙을 복직시켜 통일을 도모하자고 발표했으며 5월 29일 쑨촨팡이 쑨원과 쉬스창에게 모두 하야를 요구했다. 6월 1일 우징롄, 왕가양 등 구국회의원 203명이 텐진으로 모여들어 쉬스창을 비방했다. 쑨촨팡에 이어 [[치셰위안]]이 5월 29일, 쉬스창의 사퇴를 요구하자 쉬스창은 5월 31일, 사퇴 의사를 밝히며 사직의 적절한 방도를 마련해달라고 통전했으나 6월 1일, 국회가 쉬스창을 '가짜 총통'으로 규정하고 그가 통일을 방해한 죄가 있다고 맹비난하자 바로 다음날인 6월 2일, 몸이 쇠약하여 물러난다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톈진의 사저로 돌아가 은거했다. 6월 11일 리위안훙이 5대 대총통에 취임했다. 이후 정치에 완전히 관심을 끊고 서화 등 예술에 전념하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베이징과 텐진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는데 [[일본 제국]]은 쉬스창을 괴뢰국인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장으로 옹립하려 시도했으나 쉬스창은 거부했다. 이후 [[방광암]]에 걸려 1939년 6월 사망하여 고향 하남성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으나 전쟁 중이라 이뤄지지 못하고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